나는 편퇴족이다

편의점으로 퇴근하는 직장인의 일상

by 껄룩

편퇴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퇴근길에 꼭 편의점에 들른다고 해서 '편퇴족' 이라고 한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편의점으로 퇴근한다는 의미가 더 잘 들어맞지 않나 싶다. 소량만 구입하고 신용카드를 내밀어도 눈치 주는 법 없고, 밤늦게 찾아가도 항상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사람들을 맞아준다. 접근성이 좋지만 익명성도 높아 편안하게 쇼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 편의점. 그리고 일본에 이어 편의점의 왕국이 되어가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충실한 백성들, 편퇴족. 나도 그들 중 한명이다.


편의점 브랜드들 중에서도 나는 CU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그 외의 차별성은 솔직히 말해 느끼기가 어렵다. 요즘에는 PB 상품들도 대부분 비슷비슷해지는 느낌이다.


오늘도 CU로 퇴근했다. 내가 들르는 시간 매번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머리를 노란색과 핑크색의 투톤으로 염색한 여자 알바생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본 척도 않은 채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다. 나는 오히려 나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습관처럼 음료수 냉장고로 향한다.


500ml짜리 코카콜라는 편의점에 들렀다면 그냥 지나치고는 못 배기는 아이템이다. 아차, 집었던 코카콜라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 넣는다. 건강 때문에 콜라를 줄이는 중인데 사실 이러면 편의점을 방문할 이유가 40%쯤은 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아쉬움을 삼키며 발걸음을 돌린다.


그 다음으로는 음료수 냉장고에서 반 바퀴 뒤로 돌면 바로 보이는 과자 섹션을 살핀다. 요새는 거의 일주일에 하나 꼴로 신상품이 나오기 때문에 매번 꼭 체크해 봐야 한다. 워낙 과자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랍스터맛 감자칩, 탕수육맛 과자, 진한 참기름으로 고소하게 구워낸 해남 김맛 감자칩 등 아무리 기상천외한 신상이라도 일단은 먹어보는 주의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날 살 물건들을 아무 말 없이 카운터에 쏟아 놓으면 알바생도 아무 말 없이 기계적으로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는 하나씩 바코드를 찍는다. 계산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ARS의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CU 적립카드 있으세요?


매번 물어보는 게 귀찮으니까 저걸 녹음해서 자동으로 틀어놓나 하는 생각에 질려버리지만, 저 목소리를 매일 들으면서도 한사코 적립카드를 만들 생각은 안 하는 나도 징하다. 매일 오면서 모으는 적립금이면 방송에 나오는 김도균씨 만큼은 아니더라도 편의점 도시락을 몇 번은 사먹었을 텐데. 마일리지 시스템이 효과를 보려면 일단 고객으로 하여금 마일리지 적립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편의점 밖의 공기는 상쾌했고 내 한쪽 손에는 오늘 일용할 양식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군것질거리들로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진다. 나는 오늘도 편의점으로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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