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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Sep 28. 2024

단 하나인 남자애_열 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10)

'서두르지 말고 살랑살랑 오셔요.'     


혜원이 남자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처음 만나기로 한 그 애는 스물 일곱살의 남자애였다. 살랑살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남자라니, 이런 애가 현실에 있다니. 혜원은 궁금한 마음에 잰걸음으로 서둘렀다.    

  

남산 도서관 앞에 그 애가 서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둘은 남산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중턱 즈음 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혜원은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을 볕이 보리처럼 부드러운 그애의 볼과 콧잔등 위에서 구르고 있었다. 빛이 아름다운 건지 그 애가 아름다운건지 도통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선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문득 노린재 한 마리가 그 애의 손등에 앉았다.      


그 애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안녕, 하고 인사하고는 날려주었다. 그 애의 동작에는 어떤 허위도 가식도 없었다. 몸이 아주 가벼운 수도승처럼, 그 애는 말하고 걷고 행동했다. 혜원이 어색함을 떨치려 가짜 웃음을 자주 짓는 것과는 달리, 그 애는 정말 웃고 싶을 때만 웃었고, 말하고 싶을 때만 말했다.      


그애는 걷다가 자주 쉬어가자고 말했다. 혜원이 보온병에 담아온 유자차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 나눌 때, 그 애와 혜원이 앉은 곳 그 어디나 볕 잘드는 카페가 되었다. 그 애는 바람이 불어올 땐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면 혜원은 그 가만한 옆 모습을 보려고 하려던 질문을 삼키게 되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선한 바람을, 푸른 공기를 느끼고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시간은 느리게 지나갔다.      


혜원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알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걸. 둘은 걸으며 서로가 태어나던 날과 가까운 사람이 죽었던 날에 대해 말했다. 세상에 비밀이라는 건 없는 사람들처럼 이야기했다. 그 애가 원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혜원과만 가능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혜원과 그 애는 오래오래 걸었다. 나무가 좋아서 산림과학부에 갔다는 그 애가 길목에 서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알려주었다. 혜원은 그 이름들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좋았다. 혜원은 그 애의 목소리 앞에서 마치 시 낭송을 듣는듯 말간 마음이 되었다. 낮에 만나 해가 넘어갈 때까지 걸었는데도 신기하게도 혜원은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산 꼭대기에 오르자 혜원과 남자는 각자가 서울에서 몸 기대어 사는 곳을 짚어보았고, 다시 되돌아 돌아가기로 했다. 노을을 보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애가 혜원의 시시한 농담에 크게 웃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직감했다. '망했구나.' 이 애를 내가 먼저 좋아하게 되고 말았구나, 하고.


그건 이제부터 행복과 아픔이 동시에 들이닥친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나와 그애가 있는 곳을 빠르게 도려낸다는 의미였다. 그 애 없이 혼자 있을 땐 죽음처럼 긴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의미였다.      


그애가 영화를 보자고 해서 혜원과 그 애는 종로에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어디에서 뭘 먹으면 좋을까, 혜원은 꼼꼼히 분위기 좋은 식당들을 검색해 온 터였는데 갑자기 가을답지 않게 소낙비가 내렸다.  그 애가 문득 혜원을 보더니 비를 맞고 뛰어 가자고 했다. 어디로? 혜원이 당황해 묻자 그 애는 말 없이 먼저 빗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애가 향한 곳은 작은 포장마차였다. 날씨 좋은 여름이면 노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즐비한, 정취 있는 거리였다. 혜원은 포장마차에 와 본 게 처음이었고, 그 처음이 그 애와 함께라서 포장마차를 좋아하게 됐다.      


혜원과 그 애는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애는 비건이었고,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고 했다. 혜원은 그 애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시간을 잊었고 공간을 잊었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버렸다. 마감 시간까지 이야기에 열중한 둘을 보고서, 포장마차 이모가 한 마디를 던졌다. "뭐가 저리도 좋을까". 그 애는 대꾸없이 그냥 빙긋 웃었고, 혜원은 답했다. "그런데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혜원과 남자는 열두시가 되도록 종로3가를 쏘다녔다. 혜원은 당장이라도 그 애를 데리고 집에 가버렸으면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무언가 소중한 것이 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랬다가는 친구도 될 수 없을지도 몰라, 참으면서 혜원은 일주일치의 인내심을 모조리 썼다. 그 애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간 혜원은 완전히 지친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어렵고 슬프고 좋고 황홀하고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혜원의 온몸을 복잡하게 휘감았다.      


남자와 혜원은 시월 내내 함께 주말을 보냈다. 걷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영화를 봤다. 그 애가 눈 앞에 있을 때는 혜원은 틀림없이 그 애도 나를 좋아한다고 믿게 됐다. 그 깊고도 정직한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애는 꼭 신데렐라같았다. 밤이면 자기 집으로 꼭꼭 돌아갔고 그 뒤에는 며칠이고 연락이 없었다. 주로 먼저 연락을 넣는 건 혜원 쪽이었고, 그 애의 답장은 몇 시간 뒤, 혹은 그 다음날에 도착해 있는 일도 있었다.


혜원은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행여 집착으로 보여 그 애가 달아나기라도 해 버릴까 두려웠다. 아마도 그 애는 혼자 있는 시간도 함께 있는 시간 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겠지, 매 시간 그 시간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겠지, 혜원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잠들면서 애써 그렇게 믿었다.      


그 애에게서는 일주일간 연락이 없었다. 사고라도 난 걸까? 너무 바쁜가? 어디가 아픈 걸까? 갑자기 내가 싫어진 걸까? 수십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혜원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문득 그 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혜원, 잘 지냈어?

그 애의 말간 목소리를 듣자 혜원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애는 일주일간 홍천의 어느 깊은 숲에 다녀왔다고 했다. 동기들과 함께 나무들을 측량하고 표본을 채집했다며. 그 애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혜원은 어쩌면 오늘 만남을 기점으로, 남자와의 관계가 끝나거나 혹은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언제나 그랬듯이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있었다. 그 애는 혜원이 아주 좋아할 만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혜원은 또다시 두근대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호흡이 가빠질 즈음, 도착한 곳은 혜원도 자주 갔던 영화관의, 맨 꼭대기 옥상이었다. 그런 공간이 있는 줄 혜원은 알지 못했던 곳. 입구엔 출입금지 문구가 크게 쓰여있었지만, 그 애는 자주 와 본 곳인듯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밖에는 깊은 밤 별이 내린듯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로는 한강이 흘러가고 있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정집의 노랑빛 불빛들이 따스했다. 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남겨두려 혜원이 휴대폰을 꺼내들자, 그 애는 손으로 가만히 혜원의 손을 막았다.      


"휴대폰으로 찍지 말고

눈을 두 번 깜빡, 깜빡, 해봐.

그렇게 하면 마음에 찍히거든."      


혜원은 그 애의 말대로 두 번, 천천히 야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애의 얼굴을 보며 보다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였다. 깜빡, 깜빡.      


혜원은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말의 의미를 절절히 체감했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혜원은 고개를 돌려 그 애의 볼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남자가 혜원의 입술과 자기 볼 사이에 가만히 손바닥을 넣었다. 시간이 무참히 흘러가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늘 혜원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여기서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나 해외 인턴쉽에 합격을 했어. 그래서 다음달에 한국을 떠나. 거기서 2년 정도 있을것 같아. 곧 떠날 사람이라서 어떤 약속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그리고 여전히 내 마음 속에는 예전에 만났던 친구가 남아있어. 나는 단지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어. 오늘 먹은 떡볶이가 맛있었다든지, 노을이 참 예쁘다든지,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그런데 혜원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해. "        



혜원은 그 애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연애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게 뭔지 혜원조차 알지 못하지만, 끝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 애와 둘만 아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싶었다. 그 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절절히 껴안고 싶었고, 그 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혜원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지각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잘 웃었으며, 끼니를 챙겨먹고, 매일 머리를 감을 수 있었지만 속으로부터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혜원의 마음에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커다란 맨홀이 생겼다.


혜원은 휴대폰을 켜서 틴더 어플을 깔았다. 아무나, 정말 아무나라도 좋으니까. 어차피 누가 되었든 그 애, 세상에 단 한 명 뿐인 그애를 대신할 수 없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혜원은 마구잡이로 남자들에게 라이크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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