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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Oct 05. 2024

사랑은 하지 말자던 남자_열 두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12)

혜원은 혼자서도 추운 밤을 잘 넘기는 여자였다. '였다.' 카페와 책 한 권만 있으면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는 여자였다. '였다.' 지난 남자가 지나간 후에, 혜원은 이제 적막을 견딜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혼자를 견딜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혜원은 방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다. 이불과 베개까지 다 가져다가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남자의 체취가 나는 것만 같아서.


혜원은 자신의 방에서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사위가 캄캄하게 잦아드는 것이 두려웠다. 혜원은 밤이 싫었다. 꿈 속에 남자가 나올까 봐 두려웠고, 깨었을 때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까봐 두려웠다.     


지난 남자에게 크게 데이고도 혜원은 어플을 지우지 못했다. 도리어 퇴근 후 시간을 모조리 어플 속 남자들을 들여다보고, 남자를 만나는 데에 쏟게 되었다. 난파된 배 위에서 그만 바닷물을 마셔버린 사람처럼. 혜원이 손 댄 가벼운 만남들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말랐고, 그래서 혜원은 그것을 더욱 갈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보내고, 혜원은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대뜸 혜원에게 캠핑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혜원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답하자, 남자는 나중에 더 친해지면 같이 캠핑을 가자고 말했다. 남자는 혜원에게 많은 것을 물어봤다. 남자는 회사원이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들은 항상 똑같고 늘 작은 박스 안에 갇혀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늘 어디로든 탁 트인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남자는 혜원을 자주 응시했다. 걸어가거나 뭔가를 바라보거나, 먹는 모습들을 은근히 바라보길 잘 했다. 아주 흥미로운 생명체를 바라보듯이. 그리고 혜원이 하는 이야기들, 특히 방송국이 시간에 쫒겨 돌아가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신기하게 들었다.


남자는 자기 주변에는 혜원같은 사람이 없다면서, 혜원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흥미로운 것과 사랑은 얼마나 닮아있는 걸까? 혜원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혜원이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축구와 여행을 좋아했고 천진난만했으며, 활동적인 면모가, 식물보다는 동물적인 사람이었다.     


남자와 혜원은 첫 만남에 소주에 곱창전골을 곁들여 먹었다. 둘은 기분 좋게 취했고,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남자는 능숙했다.밤의 고속도로를 드라이브하듯이, 이미 몇 번이나 깬 게임을 플레이하듯이. 남자에게 행위는 그저 즐거운 어떤 것 같았다. 거기엔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의미부여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혜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남자는 눈 앞에 있는 여자에게, 온전히 집중할 줄 알았다.     


혜원은 직감했다. 이 남자는 단순하다. 좋으면 만나고 싫증나면 떠날 것이다. 이 남자를 사랑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원은 어쩔 수 없이 혜원이었다. 어느새 마음의 빈집에 남자를 들여놓고 말았다.

    

남자는 퇴근 후 자주 혜원의 방을 찾아왔다. 남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혜원을 찾지 않았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남자가 말해주지 않아 혜원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밝은 시간에는 혜원을 찾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퇴근을 하고 난 뒤에, 피곤하지 않은 날에, 그럴 때만 혜원을 찾아왔다. 혜원은 남자와 캠핑을 가지 못했다.     


혜원은 이 관계는 사랑도 아니고, 연애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혜원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동시에 혜원은 바보였다. 남자를 위해서 딸기를, 무르지 않고 빨갛게 아름다운 딸기를 골랐다. 맑은 주황빛이 도는 오렌지를 골랐다. 저녁이면 그것들을 정갈한 그릇에 담아놓고 남자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다.     


혜원은 남자가 떠날까 봐 아무것도 묻지 않으려 애썼다. 눈빛 하나라도, 어떤 기척 하나라도, 사랑이 묻어나면 남자는 진절머리를 치며 떠날것만 같았다. 남자는 예쁘게 깍인 과일을 보며 그렇게 말했으니까. 우리 서로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잠시 서로 기대어 지내자고. 자신은 사랑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아픈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아픈 것.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은 그런 거였다. 혜원은 '그렇게 아픈 것'을 바보처럼 또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채, 천천히 젖어들어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달큰한 냄새를, 후각이 예민한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혜원이 남자에게 써 두기만 하고 주지는 않은 편지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혜원이 가만히 자신의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이크'하는 표정으로 들켜서 웃었을 때. 혜원이 절정 끝에 돌아누운 남자의 등에 살짝 입맞췄을 때. 남자는 결심했다. '이제 이 여자를 떠날 때가 됐네.'


남자에게서는 2주 째 연락이 없었다. 혜원이 전화를 걸자, 남자가 받았다. 혜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 하나 때문에 세상 무너진 듯 우는 여자가 얼마나 멋없는지 아느냐고. 나는 한스러운 여자를 싫어한다고.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혜원은 그렇게 연락이 끊긴 뒤에도 매일같이 남자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눌러봤다. 한달 즈음이 지났을 때, 혜원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남자가 혜원과 마지막으로 갔던 장소에서, 남자를 닮은 천진한 여자와 손을 잡고 찍은 사진. 혜원과는 한 번도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혜원을 만나면서도 그녀와 사귀고 있었을지 몰랐다. 혜원은 가만히 그 사진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화가 나질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황망하다고 해야 좋을까, 온 몸의 액체가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혜원은 지도 없이 또 한번 사막에 버려진 기분을 느꼈다. 내 외로움이 사람을 보는 눈 마저 완전히 덮어버렸구나. 이제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이 끝없는 목마름을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까. 덮어지지도 않고 참아지지도 않는 이 난처한 목마름을.


스물 여덟살의 혜원은 이제는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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