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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Oct 09. 2024

마지막 페이지

혜원과 12명의 남자들(13)

  열두 번째 남자가 떠난 뒤로 혜원은 회사에서 자주 안 하던 실수를 했다. 첨부파일 빠진 메일을 보낸다거나 지방 출장에서 업무 정보가 가득한 휴대폰을 잃어버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음으로 새벽 4시 반 즈음 동이 터오기 시작하면 혜원은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 출근을 했다. 종일 멍한 상태의 혜원을 한 선배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혜원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혜원은 친구들에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는 아주 흔하디 흔한 쓰레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혜원은 알고 있었다. 혜원은 애틋한 마음이 일지 않는 상대와 입을 맞출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혜원은 그동안 짝사랑하거나, 데이트해온 남자들 각각을 마음을 다해 좋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꼭 그 사람이라서만 가지고 있는 빛나는 조각을 발견했고, 그것이 때로 혜원을 상처내더라도 꼭 쥐고 있었다. 그건 곧 온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는 날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혜원은 다시 다음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조금씩 실금이 간 마음이 어떤 전조도 없이 쫘악- 갈라져 선명하게 동강이 난 것만 같았다.      


그런 혜원을 지켜보던 회사 선배가 한 명 있었다. 프로젝트 하나가 끝난 뒤, 선배가 혜원을 불러 물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자신은 곧 이직을 하니까 회사 사람이 아니라 그냥 편한 선배라고 생각하고 말을 해주면 고맙겠다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다고. 혜원은 일을 같이 하는 사람에겐 마음을 다 열어 보여주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선배라면 누구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고, 그저 어린 날의 헤프닝같은 것으로 혜원이 겪은 사랑을 눙쳐버리지 않고, 들어줄 것만 같았다.      


혜원은 한 남자와 연애라고 부를 수 없는 이상한 관계를 가졌으며, 그 이상한, 이름 붙일 수 없어서 더 혼란스럽고 아팠던 만남이 얼마 전 끝이 났으며, 그래서 한 달 내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웃음기 없이 이야기를 듣던 선배가 물었다.      


"애를 많이 썼겠네요. 그런데 그 사람과의 관계가 혜원씨가 정말 하고 싶던 사랑의 모습이었나요?"     

"아니었던것 같아요."      


선배는 혜원을 마주보고 어떤 조언 한 토막을 해 주었다. 그건 아는 척 하는 말도, 말하는 사람을 위한 말도 아니고 정말로 혜원에게 필요했던 말이었는데, 혜원은 그 말들을 그날 집에 오자마자 좋아하는 볼펜으로 종이에 적어서 침대맡에 붙여두었다.      


선배는 곧 지방으로 떠났고, 남아있던 혜원도 더 하고 싶은 일, 일하며 타인의 마음을 덜 훼손하는 일을 발견하며 이직, 그리고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옮기는 동안 선배가 해 주었던 조언을 적은 종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혜원은 그 말들을 잊고 지냈다.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에 적응하는 동안, 혜원은 데이팅 어플을 켜지 않았다. 매일 저녁 땅거미가 내리면 휴대폰은 집에 두고 근처 공원을 달렸다.       


혜원은 매일 달렸다. 어떤 날은 걷기에 가까운 날도 있었다. 걸으면서 나뭇가지에 앉은 박새나 물까치 같은 것들을 보는 날도 있었고, 숨이 차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 그냥 코앞만 보고 달리는 날도 있었다. 비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나가서 걸었다. 천천히 걷는 날에 혜원은 애써서 빈 마음 속까지 내려가보려고 했다. 혜원은 그 빈 터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이 광활하고 쓸쓸한 곳에 딱 맞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온기에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 기대여야만 한다면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런 것들을 열심히 생각했다.     


곰 남자처럼, 오랜 기다림에도 뭉개지지 않은 사람을 사랑해야지.      


무지개를 봤던 남자와 달리 핑퐁처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네.      


내가 쓰는 글을 가치 있게 여겨주는 사람을 사랑해야지.      


이젠 누군가의 뒷모습이 가여워서 사랑하진 말아야지.      


한없이 편지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마음은 주지 말아야지.      


은유도 비유도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줄 사람을 사랑해야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서 사랑해야지.       


오늘은 한 걸음 내가 좋고, 내일은 다시 두 걸음 뒷걸음치게 되더라도, 나를 좋아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혜원은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                




[선배의 메모]

혜원씨처럼 좋은 사람이 자꾸 세상이 만들어 놓은 연애 시장에 

스스로를 가져다가 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화원을 제대로 가꾸어 놓으면, 거기에 딱 맞는 한 사람이 와요.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화원에 쓰레기를 자꾸 채워 넣지 마세요. 

그러다간 나중에 좋은 사람이 왔을 때 들어갈 자리도 없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너무 슬프잖아요.      


혜원씨, 몇 년 뒤에는 그 사람 만날 거예요. 

혜원씨의 세계에 딱 맞는 사람. 


나는 믿어져요. 




(그렇게 혜원이 결국 만나게 된 혜원의 정원에 꽃을 피워준 사람과의 이야기는 

책 <나는 이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지 않는다>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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