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던 남자_아홉 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9)
혜원은 남자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다녀온 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를 아주 많이 좋아했었다는 걸. 혜원은 아무도 모르게, 무미건조한 표정을 연기하며 남자 옆의 여자의 자리에 자신을 조용히 겹쳐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는 어울리지 않지, 하면서.
혜원은 프로젝트 작업중에 카메라 감독으로 온 남자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순박한 인상, '견실하다'는 단어가 절로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둘은 세 달 정도 영상 하나를 함께 만들었고, 종종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어느 겨울 함께 만둣국을 호호 불며 먹던 날에, 혜원이 남자에게 훗날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빨리 결혼해서, 따듯한 '우리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생기면 태어났을 때 부터 스무살이 될 때까지 찍은 푸티지들로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막 성인이 된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혜원이 '애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묻자, 남자는 아빠 평생 소원이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을까요? 하면서 싱긋, 웃었다. 혜원은 그 싱긋한 웃음이 참 저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조미료 없이도 잘 키운 재료로만 깊은 맛을 내는,
그런 만둣속 같은 웃음이네.'
함께 일을 하는 건조한 사이인 남자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선물처럼 여겨졌다. 별것 아닌 말들, 소소한 잡담이면서도 자신의 삶과 미래에만 집중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참 귀했다. 도처에는 '남의 말'들이 난무했으니까.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타인들, 그러니까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연예인들을 식탁에 올려 뒤적이곤 했으니까. 혜원은 남자와만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게 좋았다.
그렇게 둘은 만둣국을, 비빔밥을, 돈까스를, 냉면을 같이 먹었다. 세 달이면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작업이 길어져만 가던 여름, 갑자기 사정이 생긴 조연출 대신 혜원이 현장을 도우러 나가게 된 날이었다.
쉬는 시간, 혜원이 어떻게 하면 인터뷰를 잘 할 수 있는지 남자에게 묻자 남자는 갑자기 의자에 앉아있는 혜원의 앞쪽에 철푸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먼저 저한테 아무거나 질문해 보세요."
혜원이 질문을 고르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동안,
남자는 그런 혜원을 사뭇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때 까지,
카메라 뒤에서 기다려주면 돼요.
저도 매번 어렵지만요."
혜원은 잘 질문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남자는 잘 듣는 게 답이라고 했다. 그게 남자의 방식이었다. 기다려 주는 것. 혜원은 기다리는 일에 가장 서툰 사람이었다. 침묵을 견디기엔 혜원 안의 불안이 너무 컸다. 불안은 긴 침묵의 공백을 나쁜 상상으로 채우라 부추겼으니까. 업무에서 뿐만 아니라, 혜원 혼자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제 풀에 지쳐 접어버린 짝사랑도 여럿이었다. '기다림, 기다림.. ' 혜원은 남자가 해 준 말을 몇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혜원은 처음으로 기다렸다. 남자에게 자신이 끼어들 틈이 생기기를.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동료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다가갈 타이밍이 주어지기를, 혜원은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다.
프로젝트를 모두 마친 뒤 꽤 시간이 흘렀을 때, 혜원은 오랜만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남자는 흔쾌히 자리에 나왔고, 둘은 점심을 먹으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좋은 대화들을 나눴다.
하지만 이제 남자의 이야기 속엔 한 여자가 있었다. 훗날 아내가 된 사람이었다. 혜원은 오래도록 기다렸던 말을, 타이밍을 잃은 한 마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럼에도 이 말 만큼은, 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단 마음으로 남겨두고서.
"그동안,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