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편지 남자_일곱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7)
남자의 SNS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다.
미색 편지 봉투의 닫는 면이 압화로 장식되어 있다. 말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분홍빛 패랭이꽃이다. 남자는 이렇게 썼다. '아름다워 읽기 힘든 꽃.' 혜원이 남자가 사는 시골 마을로 며칠 전 부친 편지봉투였다.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편지를 뜯어야 할텐데, 보낸 이는 아름다운 꽃으로 그 입구를 봉해두었다.
시작은 남자가 부른 노래 한 곡이었다. 눈보라치던 겨울, 스물 언저리의 혜원은 우연히 남자의 노래를 듣게 된다. 간소한 기타 소리로 시작된 음률이 절정을 향하는 동안 혜원은 거리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따뜻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남자는 낡은 통기타 한 대와 목소리만으로 그렇게 했다. 혜원의 마음, 그 지하실 깊은 곳까지 단박에 뚫고 들어갔다.
혜원은 그 겨울 내도록 남자의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 목소리와 가사가 혜원을 위무했다. 어딘지 조금은 한이 서린 목소리, 쓸쓸한 가사였다. 그 노래들은 혜원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보다는 어둠을 함께 응시해주는 듯했다. 차가운 바람을 같이 맞고 서 있어주는 것 같았다. 혜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의 노래를 틀었고, 가사를 흥얼거리며 과제를 하고, 이어폰을 끼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그의 목소리가 있어서 혼자 있어도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봄이 오자, 혜원은 학교 근처 공원에서 작은 꽃들을 따서 보존제를 뿌리고 다림질 해 고이 말렸다. 어쩌면 오고 갈 편지를 기다리며 준비해두고 싶었다. 그리고는 그의 SNS에 적힌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노래를 잘 듣고 있다는 말, 그리고 혜원이 그간 써둔 짧은 글 10편을 함께 묶은 파일을 보냈다.
혜원은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목소리로, 가사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어 있는 글들을 보냈다. 어쩌면 자신의 파편이라 할 수 있는 그 글들이 남자의 일상에 작은 위로, 혹은 재미, 하다못해 웅덩이를 잠시 흔드는 조약돌이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혜원은 몇 주를 기다렸다.
'혜원씨가 보내주신 글들을 읽으면서 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자의 답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혜원은 다음 줄을 읽는 것이 두렵고 아까워 눈을 질끈 감았다. 메일을 종이에 프린트 한 뒤 호흡을 가다듬고는, 그에게서 온 첫 번째 답장을 읽어내려갔다. 혜원의 글이 근래에 메말라 있던 남자의 마음에 단비처럼 와 닿았으며, 자신은 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노래를 만들거나 서울로 공연을 가곤 한다는 이야기였다.
편지 말미에 그는, 이 편지를 시작으로 혜원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며,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올해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쓰고 있었다. 일하는 학교의 주소와 연락처도 적혀있었다.
혜원은 속이 좋지 않았다. 내장이 뒤틀리게 기뻤다. 꿈이면 어쩌나 싶어 자신의 통통한 볼을 연신 꼬집어 볼 정도였다. 혜원은 당장에 편지지를 꺼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손편지를 썼고 말려둔 꽃으로 마무리 장식을 했다. 이미 전화도, 문자도, 카카오톡도, 메일도 아주 빠르게 보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혜원은 그렇게 했다.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 흩어져버리고 마는 목소리로 전하기엔 너무나 절절했고, 금방 전송되는 문자로 보내기엔 너무나 식지 못한 마음이었다. 뜨거운 춘심이었다.
봄에 시작된 편지는 겨울까지 이어졌다. 서로의 일상, 꿈, 과거의 상처까지 나눌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종이 위로 오갔다. 편지가 여의치 않을 때는 종종 메일을 보내기도 했고, 글만으론 마음이 덜 전해질 때는 택배를 주고받기도 했다.
자취를 하는 혜원에게 남자는 종종 밥을 챙겨먹으라며 마을의 특산물인 김을 보내주곤 했고, 언젠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이라며 가족 사진집인 <윤미네 집>을 헌책방에서 구해 보내주기도 했다. 그가 보내온 사진집에는 정겹고 따스한 한 가족의 풍경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나와 가정을 꾸릴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혜원은 커다란 사진집을 넘겨보며 상상했다. 우편물이 쌓여갈수록, 얼굴을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혜원의 욕심도 쌓여갔다.
드디어, 남자가 연말 공연에 혜원을 초대했다. 혜원은 목을 아껴야 하는 남자를 위해 한 땀 한 땀 보라색 목도리를 떴다. 그것을 소중히 챙겨들고서 작은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날, 남자는 다섯 곡을 불렀고 세번째 곡을 부르던 중에 목의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남자는 노래를 마무리짓지 못한 채로 마이크를 들었다.
"이 자리에 혹시, 혜원씨가 와 계신가요?
저와 올 한해 내내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많은 힘을 주신 분인데, 제가 오늘 공연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노래가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하네요. 혜원씨, 혹시 와 계신다면 공연을 마치고 인사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도 기대감으로 온 몸이, 목소리까지 굳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혜원은 조심스럽게 기대했다. 혜원을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편지 밖의, 실존하는 혜원이 어떤 여자인지 너무나 궁금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원은 남은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혜원은 또한 알고 있었다. 기대가 클 수록 실망이란 경우의 수도 커진다는 것을.
혜원은 목도리와 꽃을 들고 대기실을 찾아갔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둘은 인사를 나눴고, 그게 끝이었다. 혜원은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실망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는 것 말고는. 동료 음악가가 혜원에게 다가와, 그가 오늘 공연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많이 지쳐 있으며, 혜원과는 다음에 다시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왔다.
혜원의 마음이 조금만 덜, 절절했더라면. 조금만 미지근했더라면. 혜원은 그와 다시 어느 카페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차를 한 잔 마시고, 그날은 왜 그렇게 긴장하셨냐며 농담을 건네고, 보통의 시작하는 인연들처럼 밥을 한끼 먹거나,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혜원은 너무나 혜원이라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미 혜원은 혜원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스물 언저리의 혜원에게는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는 스위치같은 것은 없었다. 오로지 밤을 새워 쓰는 편지, 꽃잎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공을 들이는 마음, 그 사람의 편지나 메일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분적 무기력. 답장이 오면 내장이 뒤틀리게 설레고 기뻐서 밥도 먹지 못할 정도의 상태. 그런 것만이 그 시절의 혜원이었다.
그래서 혜원은 뚝, 혼자서 부러지고 말았다.
용암처럼 마음을 불태우곤 혼자서 단숨에 사그러트리고 말았다. 너무나 커져버린 혜원의 마음은 모든 것을 과하게 받아들이고 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남자는 분명, 음악가로서 그날 공연을 만족스럽게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남자는 아마도, 가장 마음과 몸의 컨디션이 자신 다울 때 혜원을 마주하고 무슨 말이든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혜원은 그날 공연장에서의 일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나를 실제로 보고 너무나 실망하셨구나. 내가 미인이 아니라서 안 되는구나. '내가, 내가' 그 사람이 그리던 여자의 모습과는 달라서...'
혜원은 뜨겁고 빠르게 마지막 메일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남자에게서도 마지막 메일이 와 있었다.
"혜원씨 때문이 아닙니다.
혜원씨 때문이 아니에요.
정성으로 짠 목도리 잘 감고 다닐게요.
그것은 시간으로 짜여진 그물일 것입니다.
나의 소진과 고갈을 막아주겠지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혀 실망치 않았어요.
왜 실망할 것 처럼 생각하셨어요.
제가 너무나 많이 약해져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분간 저는 긴 휴식을 하고
봄이 오면 다시 노래를 할 생각입니다.
그 때 할 수 있다면요.
그 때는 제가 초대를 드릴게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깊은 잠 주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