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남자_여섯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6)
작은 방 안에 사람들이 다 모이자, 혜원은 안 보는 척 빠르게 얼굴들을 훑었다. 20대 후반에서 서른 초반 즈음, 여자 다섯에 남자 셋. 그중에서도 둥근 안경을 쓴 남자 하나가 혜원의 눈에 들어왔다. 혜원은 그 남자를 몇 초간 관찰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눈썹을 살짝 덮었고, 보풀이 일지 않은 면 체크 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남자였다. 손목에는 과하지 않은 가느다란 실팔찌가 매달려있었다.
혜원이 취직 후 처음으로 참석해 본 모르는 사람들과의 모임이었다. 주말 독서모임. 무료해진 삶에 뭔가를 더하고 싶은데, 몸을 써야 하거나 파이팅 넘치는 모임들은 혜원과는 맞지 않았다. 독서 좋지, 생각하며 -(책 보단 사실) 책 읽는 남자는 언제나 흥미로우니까-혜원은 가입을 했다. 모임은 매주 한 권의 책을 정해서 읽고 오면, 다같이 주제를 정해 이야기를 나누고 뒷풀이도 가는, 독서 반 친목 반, 반반 독서모임이랄까. 그런 분위기였다.
그날의 선정 도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남자의 손에 들린 책에는 구석구석 색색깔의 포스트잇들이 정갈하게 붙여져 있었다. 혜원은 그 포스트잇들을 눈여겨보았다. 모임이 시작되자, 남자는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하게, 하지만 주어와 술어를 분명하게 배치하며 말끝을 정확하게 맺었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발언 기회를 양보하는, 능숙한 진행이었다.
혜원은 '말을 하는 남자'들 중에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태도는 당당했으나 거만하지 않았고, 자리에 앉은 여자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다음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느라 다른 발화자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혜원은 뒷풀이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기를 소망했다. ‘기회가 된다면,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사러가자고 말해봐야지.’ 혜원의 결심이 무색하게, 그의 주변은 모임의 다른 여자들이 재빠르게 채워앉아버렸다.
네 번째 모임 즈음 되었을 때, 혜원은 남자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 남자는 경복궁 근처에 살았는데, 재활용 관련 스타트업의 대표였고, 독서모임 외에도 유기견 봉사활동을 했으며, 피아노를 잘 쳤고, 혜원보다 네 살이 많았다.
남자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딱 두 장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자신의 회사 제품을 찍은 사진이 있었고, 메인 사진은 벚꽃 아래,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껴안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평범한듯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잘 없는, 어디 하나 특별히 빠지는 게 없는 스타일이랄까.
종교가 없는 혜원은 그를 보면서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는 것의 전형이 있다면 저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에게 어떤 결핍이 있을까? 있기는 할까? 혜원은 그가 궁금하면서도, 어쩐지 보다 멀게 느껴져 마음이 조금 식는 것을 느꼈다. 결핍투성이인 자신과는 다르게 매끄럽게 살아온 사람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
남자에 대한 흥미가 식으며 혜원은 모임에 점차 나가지 않게 됐다. 금방 끓어오른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금방 식는다. 혜원이 가스 벨브 잠그려는 찰나.. 남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혜원씨, 요즘 왜 모임 안 나오세요?
많이 바쁘신가요?'
안부로 시작된 연락은 데이트 약속이 됐다. 혜원이 사는 동네에 맛있는 태국 음식점이 있다며, 남자는 주말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단 둘이서 대화를 해본 적도 별로 없었는데, 실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나한테 뭘 팔려고 하나? 혜원은 애써서 스스로의 기대를 낮추려 해봤지만, 이미 물은 다시 맹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혜원과 남자는 작은 태국 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고 근처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주 내린 비에 벚꽃잎들은 다 떨어졌고, 싱그러운 연둣빛 잎들이 흔들리는 계절이었다. 봄날 꽃잎 같은 사람들이 졌던 그 날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혜원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첫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하고 싶었던 영화 일을 하고 있었다. 말없이 걷던 남자가 물었다.
"혜원씨는 왜 지금 일을 선택했어요?"
"그게 당시에 제가 가장 원하는 일이어서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2014년 4월 16일이 삶의 가치관을 흔드는 큰 의미였거든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하고 싶은 걸 미뤄두고 사는 게 맞나, 싶거든요. "
"그렇구나. 그런데 저는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과, 앞으로 10년, 20년도 무탈하게 잘 살거란 마음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계획이란 걸 세우면서도, 오늘을 소중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계획 없이 오늘 하고 싶은 대로만 사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은데. 혜원씨, 욜로*에요?"
"네? 욜로.. 그건 아닌데..."
스물 일곱 혜원은 데이트를 마친 뒤 작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욜로'라는 단어를 허공에 수십 번 썼다. 욜로하면 왠지 욕같은데. 욜로하다 골로 간다는 그 욜로 아니야? 지금 날 비난한건가? 내가 욜로였나?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란게 있나? 왜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못해? 아니면 맞는데 그게 나쁘냐, 이러저러해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고 왜 더 설명을 못 해? 입이 없어? 혜원은 밤새 스스로를 쏘아붙이다가,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7시, 웬 벨소리가 울려 휴대폰 액정을 보니 남자의 번호였다. 혜원이 당황하고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남자가 화사하게 인사했다.
"혜원씨 굿모닝. 잘 잤어요?
제가 어제 모닝콜 해주겠다고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어제는.. "
혜원은 너무 놀란 나머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모닝콜? 대낮에 남자라는 생물이 나한테 전화를 하는 일이 다 있다고? 지구가 멸망하려는건가? 알람시계도 있고 알람 앱도 수백개가 있는 판에 왜 굳이 전화를? 어제 나한테 욜로라면서 뭐라더니 왜..?'
혜원은 '모닝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 해주셔도 돼요. 오늘 출근 잘 하세요.' 라는 딱딱한 카톡을 보냈다. 남자는 별다른 답장이 없었다. 혜원은 그렇게 남자와의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기기를 기다렸다. 그건 나중에 모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모임의 여자 다섯 명이 모두 그와 단 둘이 만나 밥을 먹었으며, 모닝콜을 받았다는 소문-때문도 아니었고, 단지 '욜로'라는 단어 하나 때문도 아니었다.
혜원은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욜로'도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죄 없는 남자라도 원망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모닝콜은 커녕 알람 수십개를 설정해 두고도 지각을 하는 자신, 빨아둔 속옷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새로 사서 집에 다시 들어가 갈아입고 출근한 적도 있는, 아무렇게나 그냥 하루를 쳐내며 살기 바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입학도 졸업도, 취업도 늦었는데, 또 꿈 쫒는다고 나와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게 맞는 건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계약직인 지금 일자리가 끝나면 또 그 다음에는, 5년 뒤 10년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아무것도 계획해 둔 게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혜원은 살면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지금의 자신에겐 사치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계획 없이 끌리는 대로 사는 혜원이 신기해서 한 번 다가와 봤을지도 모를 그 남자. 그날 공원에서의 대화에 대해 그건 정말 무슨 뜻이었냐고, 혜원이 한 번만 다시 물어봤더라면, 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혹은 혜원이 일찍이 삶의 가치관을 정립한 여자였다면. 그날 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오기라도 있었더라면.
"저는 욜로 맞는것 같아요. 지금 제가 기분좋고 행복한게 제일 중요해서요. 대책없어 보이나요? 저는 그래야 제가 만나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고, 제 일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10년 뒤 계획 같은것도 없어요. 그런데 저처럼 즉흥적인 사람에겐,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겐 계획이란 것도 계속 달라지는 거라서 그렇게 먼 계획은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아왔어요.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지금 제가 한 선택들,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것조차 제가 감당하기로 결심한 거니까요. 제가 책임 질 거거든요."
(그런데... 남자는 정말 다섯 명의 여자들에게 모닝콜을 했을까? 새벽같이 일어나 일단 커피를 내린 뒤, 그걸 마시며 10분씩 칼같이 알람을 맞춰놓고 1번부터 5번까지 전화를 돌리는 엠비티아이 T남자의 아침을 상상해본다.)
* 욜로(You Only Live Once) :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