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과 12명의 남자들(4)
"잠시 들어갔다 가면 안돼요?
나 혜원씨 방에 무슨 책들이 꽂혀 있는지 궁금해요"
혜원은 남자와 집 앞에 서 있다. 고개 숙인 혜원은 빗물에 흘러가는 벚꽃잎만 보고 있다. 스물 두살 혜원은 짐작하고 있다. 단둘이 술을 마신 금요일 저녁, 집에서 책 구경을 하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혜원은 싫지 않았지만, 남자를 막아 설 수 밖에 없었다.
혜원은 남성 출입을 금지하는 여성 전용 하숙에 살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집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볼품없는 쪽방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아니 그보다도 숨겨놓은 뱃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가 닿자 혜원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흐려진 가로등 빛 아래서 둘은 실랑이를 이어갔다. 남자는 설득했고, 혜원은 완강했다. 결국 남자는 이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산 아래서 혜원의 눈을 똑바로 봤다.
혜원이 숨을 멈춘 순간, 남자는 갑자기 우산을 내리고는 자신의 무게를 모두 실어 혜원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혜원이 잠시 휘청했다. 키 183cm인 남자의 무게가 혜원의 오른쪽 어깨에 오롯이 전해져왔다. 둘은 그렇게 비에 젖은 채 오래 서 있었다.
혜원은 남자를 그가 쓴 글로 처음 알게 됐다. 어느 잡지에 실린 그의 짧은 시가 혜원을 위로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대학에 다니던 혜원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듯한 글, 무거운 이부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싶게 만드는 글. 혜원은 그 사람이 쓴 글을 더 읽고 싶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혜원은 글 말미에 적힌 메일 주소로 글을 잘 읽었단 연락을 보냈고, 이내 그의 블로그에 매일 들르게 됐다.
글을 읽을수록 혜원은 그가 궁금해졌다. '글을 쓰는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여자친구는 있을까?' 그와 실제로 만나게 됐을 때, 혜원은 알게 되었다. 그는 글이 아니라 돈을 다루는 사람이었고, 안경과 마른 얼굴이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혜원은 그걸 알면서도, 그가 이내 좋아졌다. 그가 쓴 글이 좋았고, 큰 키에 툭 걸친듯한 검정 모직 코트가 좋았고, 은색 안경테가 좋았으며, 웃으면 비릿하게 올라가는 오른쪽 입꼬리가 좋았다. 혜원은 그가 부르면 곧바로 나갔다.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죄책감을 누르며, 신발 뒤축을 재빠르게 늘려 신으며 서둘러 나갔다. 글을 같이 써보자는 제안으로 시작된 만남이었다. 결국 둘은 무엇도 쓰지 못했다.
그가 '근처에 왔는데 저녁 같이 먹을래요?' 부르면 밥을 먹고서도 나갔고, 몸이 아프고 비가 오는 날에도 술을 마시자고 하면 나갔다. 네 번째 그를 만나던 날, 그의 여자친구가 해외 출장을 갔다던 날이었다. 혜원은 카페에서 남자와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모마일 차가 식어가고 있었다.
혜원이 얼마전 식당에서 벗어둔 구두를 누군가 신고 가 버렸던 일을 덤덤히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아버지가 사주신 비싼 구두였고, 하필 정장을 차려입은 날이었다. 혜원은 어울리지 않는 삼선 슬리퍼를 사 신고서 택시를 잡아탔다. 혜원은 일부러 훔쳐간 건 아닐거라며, 자기 구두와 헷갈렸을 거라며 착해빠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자기 일처럼 갑자기 화를 냈다. 신고라도 하거나, 욕이라도 해주지 그랬냐며. 이 남자가 왜 나를 위해, 내가 잃어버린 구두를 위해 이렇게 열을 낼까. 혜원은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이렇게 가끔 우리 만나는 거, 저는 좋고 또 괴로워요.
무슨 생각으로 저를 가끔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괴로워서 안되겠어요."
혜원의 고백을 듣는 남자의 눈에 난감함과 오묘한 쾌감이 동시에 스쳤다.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그저 조금 오지랖을 부려 챙겨주었을 뿐인 여자의 눈물 앞에서 드는 난감함. 그리고 자신을 숭상해주는 여자가 있다는, 나 때문에 한 여자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미량의 쾌감.
혜원은 그에게서 스치는 눈빛을 보고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딱 한번만, 저 넓은 품에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혜원은 그렇게 한참을, 목을 누르며 울었다.
시간이 흘러 혜원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가끔 이 노래를 들으면 그가 생각나곤 했다. '거기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시간이 흐른뒤 혜원은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네가 사랑받기에 결국 이해 못한대도
넌 아름답지 - 김사월 <누군가에게>
어느 무더운 퇴근길에, 혜원은 우연히 그를 만났다. 둘은 공원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글은 쓰지 않으며, 최근에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혜원은 그 사이 취직을 했고, 에세이집을 냈다고 말했다. 그는 혜원에게 글을 어디서 썼냐고 물었다. 1년 정도 카페에 매일 갔다고 하자, 그는 커피값을 휘릭 계산해보고는 책으로 그 이상은 벌어야겠네요, 하고 무심하게 말했다.
둘은 헤어지는 길에, 우연히 법원 건물에서 나오던 법복을 입은 여자 검사를 스쳐지나갔다. 그는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 "혜원씨가 다시 태어나면 작가가 아니라 저런 여검사가 되는 날도 올까요?" 아무런 맥락도 없는 질문이었고, 의도가 있어보이는 질문이었다. 신호등 앞에서 혜원은 답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지금의 제가 좋아요."
혜원은 그 말을 끝으로 그와 일별하고서 걸었다.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걷고 또 걷다 혜원은 허름한 칼국수 집에 들어갔다. 콧잔등에 땀을 잔뜩 흘리며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저려왔다. 혜원은 쥐가 난 다리를 가만히 주물렀다. 덜컹이는 선풍기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면서, 혜원은 문득 자신 안에서 한 계절이 져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보며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어 바보같이 눈물만 흘렸던 한 낮, 그와 나눈 이야기와 술잔들, 그가 어깨에 기대어 왔던 비 오던 밤.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지나갔음을 혜원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쓴 글로 어린 혜원을 위로하던 그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