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Sep 02. 2024

지나친 남자_세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3)

2008년에 나온 언니네 이발관의 앨범을 들으면 혜원의 머릿속엔 언제나 한 남자가 재생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혜원은 스물 한 살 이었다. 두 번의 만남이 있었고 그는 사라졌다. 혜원은 그를 영영 잊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갔던 빨간 벽돌 2층 맥줏집이 헐린 무렵부턴 가까스로, 가끔씩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혜원은 열 세살 무렵부터 블로그에 익명으로 일기를 올렸다. 엄마가 자신의 비밀일기장을 몰래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였다. 어린 혜원은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갈 곳 잃은 말들은 차곡차곡 혜원의 블로그에 도착했다. 그동안 혜원은 스물 한살이 되었고,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혜원이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혜원의 블로그 글에는 꼬박꼬박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다. 혜원은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몇 살인지 몰랐다. 다만 그는 '언니네 이발관'을 좋아했고, 혜원도 알고 있는 소설이나 시를 블로그에 공유해두곤 했다. 혜원은 그와 댓글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내 그의 실체가, 정확히는 얼굴이 궁금해졌다.      


둘은 어느 시월 가을날 혜원의 대학교 교정에서 마주했다. 혜원이 스물 하나, 그가 서른 둘이 되던 가을이었다. 여고, 여대에 진학하며 여자들과 주로 지냈던 혜원의 눈에 그는 지나치게 키가 컸고, 지나치게 어깨가 넓은 '지나친' 남자였다.


혜원은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자기 자신인 것이 싫어졌다. 눈에는 다래끼를 커다랗게 달고-잘 보이려 처음 해본 눈화장 탓이었다-젖살도 빠지지 않은 통통한 얼굴로, 길거리에서 산 프린트가 흐릿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선 자신이. '지나친 남자'가 키 160cm의 혜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장한 혜원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두서없이 떠드는 동안, 그는 말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오래 사귄 사람과 이별했으며,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가족을 떠나고 싶어서 무작정 올라왔다는 그는 지금은 서점에서 책을 판다고 했다.


수제 맥주, 일본 소설, 그리고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에게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들은 혜원의 눈에 근사해보였다. 혜원 근처에 있던 남자아이들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스물 한 살의 혜원은 취향이 비슷하다면 반은 된 거라고, 자신의 취향은 너무나 독특해서 비슷한 취향의 남자를 지금 놓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둘은 저녁을 함께 먹고, 창밖으로 열차가 보이는 2층 맥줏집에 올라가 맥주를 마셨다. 사실 그때의 혜원은 맥주에 무슨 풍미라는 게 있는 건지, 사람들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맥주는 ‘어른’을 연기하기 위해 좋은 소품으로 보였다.


술이 들어갈수록 혜원의 얼굴은 뜨거워졌고, 눈앞의 '지나치게 남자'의 어깨는 자꾸만 더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 번째 맥주잔에 남은 거품을 바라보다가, 혜원은 불현듯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처음 느껴보는 마음이 무서웠고, 졸업하기 전까지는 공부만 열심히 하라던, 고향에 있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혜원은 마무리 지어야 할 레포트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데려다 주겠다는 그에게 교수님에게 하듯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달려왔다. 혜원은 그날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두 가지 질문이 맴돌았다.      


'내가 못생겨서 실망했을까?'

'나를 다시 만나자고 할까?'

      

연락 없는 이틀이 지나고, 혜원은 쾡한 눈으로 들어가는 수업마다 친구들을 붙잡고 왜 다시 연락이 안 오는지를 물었다. 친구들이 나이 차이를 언급하며 또 만나도 될지 걱정하는 차에, 과에서 연애를 제일 많이 했다고 알려진 언니가 끼어들었다.     


 “중요한 건 그 네 마음이야.

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그러면 기다리지만 말고 먼저 만나자고 문자를 해 봐. 그래도 돼.”     


그렇게 둘은 창경궁에서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혜원과 남자는 창경궁 대온실을 향해 걸었다. 날은 선선했고 단풍을 즐기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혜원과 남자 사이를 지나쳤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적막이 무거웠다. 혜원은 말 대신 이어폰 줄 한 쪽을 건네며 노래를 같이 듣자고 했다. MP3에서는 '100년 동안의 진심'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온실도, 궁 안의 호수정원도 모두 찬란하게 아름다웠지만, 오래도록 혜원의 기억에 남은 것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었다. 낙엽 진 나무에 부는 바람처럼 쓸쓸하던 그 어깨. 지난 8년간은 어느 여자가 기대었다던 어깨. 혜원은 안겨보지 못할 어깨였다.   

   

궁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때에, 문득 그가 지하철의 성형수술 광고판을 보고 물었다. '혜원씨는 이런 것 나중에 할 생각이 있나요?' 혜원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옅게 웃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의 자신을 좀 더 좋아해주세요.'      


그날 만남을 마지막으로, 그는 혜원과의 연락을 갑자기 끊었다. 혜원은 생각했다. 그는 왜 증발해버렸을까. 내가 ‘다음에 또 만나자’는 문자를 성급하게 보냈기 때문일까. 내가 인터넷으론 매진되어버린 온실 입장권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섰다는 걸 말해버렸기 때문일까. 내 마음이 부담스러워서겠지, 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은 거겠지...     


혜원은 자신에게 겨눈 생각의 화살을 쏘고 또 쏘았다. 그가 헤어지기 전 지하철에서 건넨 마지막 말이 중요한 단서라도 되는 것처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지금의 자신을 좀 더 좋아해주세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스스로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기 얼굴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스물 두 살 여자애에게 격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다시 연락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게 너의 외모 때문은 아니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싶었을까.      


세월이 지난 후에도, 혜원은 그 말을 담아두었다. 자신을 그때보다 조금 더 좋아할 수 있게 된 뒤에야 혜원은 그의 말에 고마워할 수 있었다. 그때 지하철 광고판 앞에서, '코를 한번 세워보세요' 라든지, '쌍커풀을 하면 더 인기가 있어질거예요' 같은 말들을 하지 않아 준 것을, 대책없이 부풀어있던 여린 마음을 상처입히지 않아 준 것에 대해서.


어쩌면 남자는, 그때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던 말을 그저 눈앞에 있던 혜원에게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자는, 그저 함께 맥주 한잔을 하며 취향을 나눌 두어 시간에 목말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새파랗게 싱싱한, 펄떡이는 혜원의 새 심장 앞에 어찌 할 바 몰랐던 거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