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아픔없는 사랑을 하는 혜원이라는 여자의 이야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날, 혜원은마음 속 서랍을 열어 이렇게 쓰인 메모를 넣어 둔다.
11월. 이제야 마음에 아릿한 뭔가, 비릿한 뭔가가 사라져간다. 완전히 겨울 안으로 들어오니까 환절기 앓이도 말끔해지고, 옛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땅히 지나가야할 사람이 지나갔을 뿐이다. 그 사람은 꼭 알고싶던 세계였고 나는 그걸 맛봤다. 그 뿐이다. 이렇게 경험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 그건 그때부턴 상처가 아니라고 배웠다. 그 배움을 믿는다.
<첫번째 남자 이야기>
혜원은 그날도 데이팅 앱을 켰다. 노골적으로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들 사이로 영화 포스터를 프로필로 해 놓은 한 사람이 눈에 들었다. 혜원이 좋아하는 영화였다. 열광적으로는 아니고, 술을 별로 찾지 않는 그녀가 가끔 혼자 맥주를 마실 때 안주로 꼭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그 감독의 영화엔 꼭 소주병, 혹은 맥주병이 나왔고, 지질한 남자들이 나왔다.
그런 영화를 걸어둔 남자의 심리는 뭘까, 뭐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생겼으려나, 이 앱에 있는 수많은 사람처럼 그냥 얘도 잘 여자를 찾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혜원은 먼저 대화를 걸었다. "이 감독 영화 좋아하시나 봐요?"
토요일 낮 11시, 서울 사직동의 작은 카페 앞에서 혜원은 얼굴 모르는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혜원의 얼굴 사진을 알고 있고, 혜원은 남자의 사진을 받지 않았다. 모르고 만나는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파마머리를 한 커다란 하얀 곰 같은 남자가 혜원에게 걸어와 말을 걸었다. "혹시, 혜원씨?" 남자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더운 날이 아닌데도 귀 뒤로 땀이 흘렀다. 남자는 혜원보다 10살은 많아 보였다.
남자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혜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봤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커다란 감색 박스 셔츠, 부츠컷 청바지, 단정하면서도 발등이 다 보이는 검은색 구두가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구두보다는, 자그마하고 하얀 발등에 마음이 쏠렸다.
혜원은 곰보다는 항상 샤프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남자가 취향이었다. 그리고 산뜻한 향기가 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흰곰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은 그 남자에게선 시큼한 땀 냄새, 옷에 오래 베여있는 노린내같은 게 났다. '편하게 이야기나 하고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혜원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정했다.
혜원은 그런 여자였다. 가장 원하는 것 앞에서는 입 한 번 벙끗 못 하고, 가장 만져보고 싶은 것 앞에서는 손끝 하나 닿을까봐 손을 꽁꽁 묶어버리는. 하지만 혜원은 또 그런 여자였다. 그냥 그렇네, 생각하며 편하게 탁, 풀어지면 자기 안의 가장 본 모습이 새어 나오는, 그 속에 매력이 있는.
남자와 혜원은 카페에 마주 앉아 따뜻한 짜이를 주문해 마셨다. 주로 혜원이 질문하면, 남자가 답하고, 그걸 혜원이 재밌게 들었다. 남자는 머뭇거림 없이 자신이 고시생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10년째 같은 시험에만 떨어지고 있는 장수생이라고.
혜원은 남자에게 마땅한 직업이 없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놀랐다. 그러나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건 그가 자신의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태도였다. 그는 10년의 세월에 깔려 문드러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10년간 계속된 실패에도 좌절은 해봤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는 않기로 한 사람 같았다. 아주 해사하지는 않았지만, 덤덤했다. 남자는 내년 한 번만 더 치고 나면 포기할 거라고, 초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혜원은 남자가 싫지 않았다. 덩치가 컸고, 냄새가 조금 났고, 장수생이었지만 그와 있으면 편했다. 그리고 그와 있으면 한 번도 거리에서 휴대폰 번호를 따여본 적 없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이, 어쩐지 승기를 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작은 쾌감에 휩싸였다. 그건 아마도 남자는 혜원을 본 순간부터 발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거였다. 데이트도 일종의 게임이라고 한다면, 먼저 뭔가를 원하게 된 쪽이 지고 들어가게 되는 거니까.
혜원과 남자는 나란히 서서 경복궁 뒷길까지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맑은 초가을이었다. 혜원은 남자에게 애써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기에, 관심을 남자가 아닌 풍경에 두고 걸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 아기자기한 것을 늘어놓은 상점을 기웃거리고,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차려입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남자는 그런 혜원을 구경했다. 그러다 혜원이 바로 앞에 있는 전봇대를 못 보고 부딪힐 뻔 하자, 남자가 이마를 감싸주며 조심해야겠어요, 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혜원은 멋쩍게 웃고서 다시 걸었다.
식당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혜원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남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저도 따라가서 담배 피우는 모습 구경해도 되나요?"하고 물었다. 혜원은 잠시 당황했지만, 구경 당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그러라고 했다.
담배 피우는 여자들이 멋져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몇 달 전 담배를 배운 혜원이, 가늘고 긴 담배를 꺼내 조심히 피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지 않는 남자는 바투 서서 그 모습을 말없이 구경했다. 남자의 눈빛은 집요한 동시에 어딘지 어설펐다. 그 눈빛은 자신이 장수생임을 말하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설명할 때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혜원은 그 눈빛을 보는 게 재밌었다.
밥을 먹고, 둘은 광화문 일대를 걸었다. 무언가를 더 하고 더 해도 좋을 한낮이었지만, 오래 구두를 신고 걸은 혜원은 발이 아팠다. 둘은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기로 했다. 혜원이 피곤한 듯 아무렇지 않게 구두를 벗자, 하늘하늘하고 투명한 소재의 양말이 씌워진 발이 드러났다. 남자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발이 참 작네요"
남자와 혜원은 그렇게 한 번 만났고, 짧은 데이트를 했다. 남자가 혜원에게 그동안 연락을 나누던 데이팅 메신저 대신 휴대폰 번호를 물었지만, 혜원은 다음에 만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 마음은 정말이었다. 혜원은 남자가 궁금했고, 얼마나 더 만나면 그 어깨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지 궁금했다. 3일 뒤에, 남자로부터 이런 메세지를 받기 전까지는.
"자요? 저는 잠이 안 와요.
혜원씨랑 섹스하고 싶어서요."
12시경 어플이 울려 휴대폰을 본 혜원은 "헉"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푸하하 웃기 시작했다. 골 때리는 아저씨구나, 싶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급하고, 어쩌자고 이렇게 솔직할까 싶었다. 혜원은 뭐라고 답장을 보낼지 한참을 고민했다. 또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자신이 먼저 다시 만나자고 하면 그건 나도 자고 싶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말을 골라야만 했다. 혜원은 물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남자가 5분 뒤 답을 보냈다.
"모르겠어요."
혜원은 남자가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어쩌면 여자의 마음을 얻기가 더 쉬웠을텐데. 몸이 동해서 그런건지, 네가 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지 나도 모르겠다는 거다. 모르겠다니, 혜원은 조금 상처를 받았고, 동시에 다시 만나서 남자의 안달하는 표정을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혜원은 남자와 다음으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장소는 혜원의 집 근처, 저녁에 만나 술을 한잔 하기로 했다.
약속 당일 오후, 혜원은 친구 영을 만난다. 그녀는 몇 번의 연애를 거쳤고,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다. 혜원은 곰 남자와 만난 일, 그리고 오늘 저녁에도 만나기로 한 일에 대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영은 혜원이 걱정됐다. 곰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탐탁지 않았고, 곰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떠난 뒤에 혜원의 마음에는 사랑 비슷한 것이 뒤늦게 솟게 될까 봐 걱정됐다.
영은 혜원에게 말했다. 자신이 술을 사주겠으니, 오늘 데이트는 없던 걸로 하라고. 잠시 나쁜년이 되고, 혹시 모를 미래의 더 나쁜 일들을 막아보자며. 혜원은 남자에게 미안했지만, 영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남자를 차단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 모든 것을 리셋하듯이.
몇년이 지난 뒤에, 혜원은 그 때의 리셋을 조금 후회했다. 우리 이 다음은 없을 거라고, 그래도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예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데이팅 어플로 만난 남자에게 교살당한 여자에 대한 인터넷 뉴스 사이에서 헤맸다.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과거에 대해선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혜원은 문득 그리워졌다. 담배 피우던 자신을 예쁘다는 듯 물끄러미 구경하던 한 남자가 있었던 어느 시절이. 그 앞에서 도도한 여자를 연기했던 어느 오후가. 혜원은 쓸데없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