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Aug 24. 2024

무지개를 함께 본 남자_두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2)

이건 바래버린 이야기이고,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혜원은 남자를 8년 전 처음 봤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봐주길 바라기 때문에. 최근 혜원은 지구 종말에 대한 영화를 한 편 봤다. 죽음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그 탓일까, 혜원은 어제 자기 전 생각했다. 만약 내가 3개월 뒤에 죽는다면, 딱 한 번만 데이트 해보고 싶은 남자가 누가 있을까? 애인에게 허락을 먼저 구하고, 연락해보고 싶은 남자..


망설임 없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뿔테를 쓴 흰 피부, 언제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 스스로가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긴장이 어린 표정.

     

혜원은 남자를 8년 전 처음 봤다. 만났다, 보다는 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만남. 그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열린 영화제의 자원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수십 명의 자원활동가들이 모여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한 극장에 남자가 들어섰을 때, 혜원의 눈에 주황색이 환하게 들어찼다. 첫 만남이었다.


혜원은 서른이 넘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날, 그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눈에 새겨진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눈에 가득 들어차던 이상한 빛, 바로 그다음 순간부터는 수십 명의 사람이 저 멀리에서 북적여도 단박에 남자를 찾아내고야 말게 되었다. 그 눈이 그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저렇게 말갛고 정갈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혜원은 그의 둥근 뒷통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의 혜원은 스스로가 가진 아름다움을 몰라봤음으로, 스스로를 보잘 것 없고 칙칙하다 여길수록, 여름날 햇살 아래의 그는 더욱 빛을 발했다. 자원활동가들은 열흘 동안 숙식하며 영화제를 만들어갔다. 15명이 넘는 사람들 중 혜원과 남자가 함께 영화 기사를 쓰는 한 팀으로 묶였다.


혜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지만 너무 좋아서 머리에 열이 펄펄 끓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스물셋 혜원은 남자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을 몰랐다. 남자도 결국은 사람이고, 친구가 될 수 있어야 손도 잡아 볼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 혜원이 해볼 수 있는 말은, "오늘은 다행히 비가 안 오겠네요.", "오늘 점심으로 나온 매운탕 진짜 맛있었어요." 정도였다. 그마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혜원은 그저 지켜봤다. 사설탐정처럼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집요하게. 5일 정도 남자를 지켜보고, 소문으로 듣고, 주변에 취재하며 수집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는 혜원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없어 보인다’ 혹은 ‘없는 것 같다’가 아니다)


둘째. 그는 서울의 대학 국문학과 학생이며, 소설을 쓴다. (불행히도 혜원은 글 쓰는 남자를 동경했다.)


셋째. 그는 초록색 틴케이스에 잘 깎은 연필 두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넣어 다니며, 마찬가지로 짙은 초록색 몰스킨 노트를 함께 보물처럼 안고 다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그저 연필이고 지우개이며, 공책일 뿐이었지만 혜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의미와 감성에 휩싸인 대단한 물건들로 보였다.)


넷째. 며칠 전 보름달이 뜬 걸 보고 그가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달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다섯째. 그가 어젯밤 뒤풀이 자리에서 어떤 여자 자원활동가와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엔 바다에서 해를 봤다고 한다.     


혜원은 마지막 소문을 입수하는 도중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느꼈다. '나는 이미 늦었다. 끝났다.' 눈 한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주제에 포기도 빨랐다. 혜원이 남자에 대해 수집한 다섯가지 정보는 그의 일부 중에서도 일부를 이루는 파편일 뿐이었다. 파편은 한 사람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잘은 파편들은 스물 한 살 혜원의 가슴에 박혀들어 따뜻한 피를 맺히게 했다.      


혜원이 스스로 펼쳐서 보여준 적 한번 없는 마음을, 고작 일주일 만에 드넓게 펼친 마음을 지레 접고 풀죽어 있던 날, 축제는 끝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오후. 비가 내렸다. 예보되지 않은 소나기였다.      


그 비가 그치고 난 운동장에서 우연히 혜원과 남자가 마주쳤다. 머리 위엔 커다란, 거짓말처럼 커다란 무지개가 떠 있었다. 남자가 그것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혜원에게 무지개를 보라고 말했다. 혜원은 그 순간 알았다. 저 사람이 내 첫사랑이구나. 이루어지지 않겠구나.      


혜원의 생각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었다. 첫사랑에게 자신 있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아무렇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혜원은 남자 앞에서 더욱 얼어붙었고 작게 졸아들었다. 이제 축제가 끝나고 마무리 되기까지 단 3일의 시간만이 남아있었다. 혜원은 어느 저녁 야외 상영관에서 모 감독과 인터뷰를 하다가, 단지 그가 연애를 많이 해 본 것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불쑥 고민을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요?”      


“일단 말을 걸어봐야죠.

그리고 대화가 탁구할 때 공이 오가는 것처럼

탁탁 잘 오가는지를 봐야 해요.

만약에 혜원씨는 7을 던졌는데

저쪽에선 3밖에 쳐 주질 않고,

대화가 자꾸 다른 곳으로 튕겨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이미 어려워요.

접는 게 좋을 거예요.”     


혜원이 그 독립영화 감독의 조언을 몸으로 깨달은 것은 이후에도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대화가 탁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상대는, 짐작하다시피 남자가 아니었다. 서로 좋아하는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5대5 혹은 6대4의 분량과 텐션으로 서로의 말을 튕겨 줄 사람, 남자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혜원은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이후로도 몇 번,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고 최선을 다해 자리를 만들기도 했었지만, 혜원은 남자와 단둘이서는 20분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빛을 본 고라니처럼, 태어나서 처음 바다를 본 사막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혜원은 꼭 그렇게 얼어붙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그 목소리를 듣고만 싶었기 때문에.


혜원은 오직 그 남자 앞에서만 목소리를 잃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