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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Sep 10. 2024

친구였던 남자애_다섯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5)

그 애는 자주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동아리방에 나타났다. 가녀린 체구 탓에 목에 걸린 카메라가 커다랗게 보였다. 혜원이 스물두 살에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 별다른 인상이랄 것은 없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남자애구나, 키가 작구나, 정도. 당시의 혜원은 자신이 그 볼품없는 남자애를 간절하게 좋아하게 될 거라곤 조금도 상상치 않았다.     


그 애와 혜원은 연합동아리를 함께 하는 사이었기에 서로의 학교를 오가며 세미나를 하거나 강의같은 걸 들었다. 어느 봄날, 혜원은 모임 장소인 야외무대 벤치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혜원보다 먼저 도착한 그 애가 있었다.


그 애는 혜원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벚나무에 앉은 작은 새들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숨죽여 집중한 그 애의 자그마한 뒷통수에서 무언가 힘찬 것이 흘러나왔다.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진을 찍고 난 그 애가 돌아서 혜원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혜원이 말했다.   

    

"새 사진 찍었어? 신기하다,

가까이 가도 안 날아가나봐."       


"사진 보여줄까? 욕심내서 허겁지겁 다가가면

날아가는데, 기대말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찍으면 돼."    

   

혜원은 그날부터 그 애가 궁금해졌다. 그 자그마한 뒷모습이 자꾸만 생각났고, 천천히 다가가면 되더라는 평범한 말을 연거푸 생각했다. 그 애는 바다가 보이고 새 소리가 들리는 마을에서 자랐다고 했다. 아래로 많은 동생들의 형이자 오빠였으며, 역사나 정치에 대한 지식이 또래들보다 많았고, 촬영 장비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점심 메뉴 하나를 고를 때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또렷한 주관을 가져 매 세미나 시간을 토론대회로 만들곤 했다. 대부분의 시간에 당당했고, 카메라를 들었을 때 가장 멋있어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혜원의 마음이 강하게 이끌린 것은 카메라를 벗고 있을 때,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때, 혼자 있는 그 애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혜원은 그 애의 쓸쓸함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여윈 볼을 감싸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혜원 자신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으면서, 그 애를 살찌게하고 채워주는 그 무엇이 되고 싶어했다. 그 마음을, 눈빛을. 새처럼 영민한 그 애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혜원의 고백보다 더 먼저.   

   

동해 바다로 동아리 MT를 떠났던 날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꼭 해야 할 말을 품고 온 혜원은 그날따라 취하지 않았다. 혜원은 그 애를 불러냈다. 그 애는 겉옷을 들고 선선히 따라나왔다. 둘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안가를 천천히 걸었다. 주황빛 가로등이 혜원과 그 애의 앳된 얼굴을 바추고 있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침묵을 깨고 그 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혜원은 그 자리에 황망히 섰다. 그 애가 이름을 말했다. 혜원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몸집이 통통하고 덜렁거리는 일이 잦은 혜원과 달리 자그맣고 앙증맞으며 야무진 애였다.      


"둘이 사귀는 줄 전혀 몰랐는데..

축하한다는 말은 안 나오네."      


혜원은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터트렸다. 이미 내 마음 다 알고 있었구나, 둘이 나 몰래 잘도 사귀고 있었구나, 내가 걔보다 못 생겨서 나는 안되는 건가.. 두서없는 생각들이 혜원에게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그 애는 혜원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가만히 가만히, 혜원의 어깨를 도닥였다. 얼마간 울음을 게워내고 난 혜원이 일어나 그 애를 마주보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

너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이렇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람."      


혜원이 말하며 그 애의 두 볼을 손으로 감싸려고 하자, 그 애는 혜원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나를 가여워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떻게 남자가 될 수 있겠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냐"


MT에서 돌아온 혜원은 그날부터 일주일이나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학점이 엉망이 되어가는데도, 겨우 5분이면 하숙집에서 뒷문으로 걸어갈 수 있는데도 문밖을 나오지 못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혜원과 수업이 겹치는 다정하고 단호한 선배 한 명이, 하숙집 주인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해 문을 따고 방으로 쳐들어왔다. 손에는 직접 끓여 온 들깨죽이 들려 있었다. 혜원은 말없이 뜨거운 들깨죽을 퍽퍽 퍼먹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자 혜원은 벼락처럼 눈물을 터트렸다. 처음 데여 본 아이처럼.    

 

혜원은 한해동안 동아리에 가지 않았다. 그 사이, 그 애가 헤어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차였다고 했다. 혜원은 그 애가 간절하게 보고싶어졌다. 그 애가 마음을 다치지는 않았을지, 마른 애가 더 마르진 않았을지, 밥은 챙겨먹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다시 만난 그 애는 조금 괘씸하리라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어제 본 사람처럼 혜원에게 말했고, 들어주었다. 혜원 역시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백은 실패했지만, 친구로라도 남을 수 있게 되어서.     


혜원과 그 애는 MT이후 이전보다 더 많은 속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더 자주 단둘이 밥을 먹는 사이가 됐다. 아마도 혜원이 한 톨의 미움 없이, 여전한 호기심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다해 그 애를 환대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혜원은 알면 알수록 그 애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그 애의 마음은 안개처럼 보일 듯 말 듯했다.     


어느 가을 혜원은 그 애에게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혜원은 그 애가 멀어지기 전에, 그 애가 떠나기 전에 그 애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배우고 싶었다. 그 애 곧 군대에 간다고 했으니까.


둘은 경복궁역에서 만나 서촌 일대를 천천히 걸으며 필름 사진을 찍었다. 가을비가 잠시 내리고 그친 풍경은 더없이 맑고 선명해졌다. 고궁 처마를 진지한 자세로 촬영하던 그 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다가,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고백을 실수하고 만다.      


"나는 너 여전히 좋아해.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너 친구로만 좋아해.

알고 있겠지만."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그래도 오늘은 그 손 한번만 잡아보고 싶네"       


"친구끼리도 손 잡고 다니냐?

나는 괜찮은데 너가 힘들거라 안 돼."      


대체 뭐가 내가 힘들거라는 건지, 화가 나면서도 간질간질한 게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혜원은 덥석 그 애의 팔짱을 껴버렸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     

"글쎄, 둘 중 하나라도 의지가 있을 때까지?"     


"둘 다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글쎄"      


"우리가 아주 오랜 뒤에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네가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 안다면

나는 네 존재만으로 고마울거야.

그러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할테니까

오늘은, 딱 오늘만 이렇게 팔 좀 빌려주라."      


"나 나쁜놈 만들지 마라~"      


그 애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혜원의 팔은 풀지 않은 채로.         

    

**에게.

지금은 너를 보러 가기 전날,

새벽 1시 45분을 막 지나고 있어.

**야, 네가 정말 군대에 가게 됐네.

애인도 아닌 내게 이렇게 늦밤까지 깨어 너에게 편지를 쓸 자격같은 게 있을까.

내일 너를 만나러 가도 좋을까.

**야. 일없이 자꾸만 불러보고만 싶다. 미안해.

이제와서 미안한거 고마운거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참 바보였던것 같아. 한 번 이라도 더 얼굴 보고

더운 밥 한끼라도 더 같이 먹을걸 그랬지.

여자로, 남자로 그런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루라도 더 보고 지낼걸 그랬다.

네가 잘 지내다 왔으면 좋겠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마음도, 몸도 다치지 말고 돌아와.

고마웠어. 내 감정에 취해 쓰는 편지라

네가 이걸 읽으면 마음이 안좋진 않을까 조금 걱정도 된다.

우리가 어떤 '형식'안에 가두어질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런게 다 무슨소용이었을까. 무슨 소용일까.

내 마음이 허전하지 않게 들어와주어 고마웠고,

너는 네 말과는 달리 하나도 나쁘지 않았어.

한 순간도 미워할 수 없었어.     

고마웠어. 마음 아팠던 만큼 좋은 추억들도 많이 만들어줘서 고마워. 지난 여름의 주홍빛 해변가도, 학교 도서관 쇼파도, 바람이 세찼지만 포근했던 경복궁도, 햇살 들이치던 짜이 가게도, 사진 찍던 네 모습도 다 나는 잊지 않을거야.      

그리고 나는, 사람에게 힘껏 기대하고 또 상처받으면서

잘 살아내고 있을게.

네가 나에게 첫 울림을 주었던 말이,

'기대하지 말고 자연스레' 였지만.

그때는 그게 참 옳다 여겨졌었지만.

지금의 나는 생각해. 기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내가 너에게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그 찬란한 나날들이 한 쪽도 남지 않았을거야.  

잘 다녀와. 응원할게. 사람대 사람으로.     


혜원은 꾹꾹 눌러 쓴 편지를 안고 선배 몇과 함께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편지를 주고, 그 애와, 그 애를 마중나온 가족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머리를 바짝 깍은 그 애의 작은 머리통이 점점 훈련소 운동장 너머로 멀어져갔다. 혜원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짝사랑하는 남자애의 파랗게 깍인 뒷통수를 보면서 울 수 있는 나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것 만으로 아름다운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 혜원의 스물 셋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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