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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Sep 23. 2024

첫 키스 남자_여덟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8)

그날 스물여섯 혜원은 신문사 채용연계형 인턴에 떨어졌다.


사실 최종 면접때부터 혜원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간절하지 않다는 걸. 날 바라보는 면접관의 눈빛이 탐탁지 않다는 걸. 결국 지금 옆에서 주먹 쥔 손을 덜덜 떨면서도 목소리를 짜내 대답하고 있는 저 남자애가 나 대신 합격하리란 걸. 예측한 소식이었는데도 혜원은 열이 나고 답답했다.


해질 무렵의 대학 교정을 무작정 맴맴 돌면서 혜원은 생각했다. '할 줄 아는 건 글쓰는 것 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기자는 아닌가? 그럼 피디인가? 소설가도 못 될거고 시인은 더더욱 아니고.. 뭐 해먹고 살지? 일도 없고 남자도 없고 모기만 꼬이네' 답도 없는 질문들을 등에 지고 혜원이 네 바퀴 즈음 나무 밑을 돌았을 때, K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혜원씨 뭐해요?

서로 친해지면 좋을 것 같은 형이 하나 있는데

혹시 지금 신촌 나올래요?

우리는 맥주 마시고 있어요."


혜원은 재고 따질 것 없이 단지 K감독의 연락이었다는 것 만으로 충분히 신촌에 갔을 거였다. 그는 몰랐지만 혜원은 몇달 전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다가 이 한 여름밤, 익어버린 몸뚱이에 시원한 맥주까지 들이붓는다고? 낯선 남자도 한명 더 있다고? 어떻게 이 조합을 마다할 수 있지?


혜원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새로 산 청치마에 청량한 스트라이프 반팔티로 갈아입고 버스 대신 택시를 탔다. '기사님, 신촌으로 좀 빨리 가주세요.'      


호프집에 도착하니 K감독과 남자는 어두운 조명 아래 맥주병들을 앞에 두고 고다르가 어쩌니 누벨바그가 저쩌니 열중하고 있었다. 둘은 혜원이 왔는데도 인사는 건성으로 하고는 내일 이어서 이야기하자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혜원도 교양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는 이름이었다. 장 뤽 고다르. 정말 '들어만' 본 이름. 혜원은 머쓱하게, 자신이 낄 수 없는 대화 주제에 대해 약간의 약오름을 느끼면서 K감독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K감독이 혜원에게 남자 옆자리를 권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형이고, 남자도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둘이 닮은 점이 많아서 대화가 잘 통할 것 같다며 언젠가 소개해 주고 싶었다고.


혜원은 남자를 봤고, 놀랐다. 닮았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남자는 너무, 혜원 자신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안경을 꼈고, 코는 낮고 둥글며, 눈은 옆으로 길었다. 혜원이 좋아할 수 없는 생김새였다.      


혜원은 난감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거고, 친구하라고 소개해 준 거지 소개팅이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맥주나 마시고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혜원은 '닮은 남자' 옆에서 긴장을 풀었다.


혜원은 말이 많아졌다. 자기 동아리에 K감독을 초청해서 함께 액티비즘 다큐를 본 일이라든지, K감독이 얼마나 재밌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혜원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들, 그리고 오늘 받은 불합격 소식에 대해서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취했는지 불현듯 혜원을 몰아세웠다. 마치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데... 인생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살아요? 혜원씨는? 진짜 하고 싶은 거에만 매달려도 짧은 게 이 인생이에요. 몰라요? 왜 그렇게 부질없는 것들을 이리 저리 찔러보면서 허비하는데요?


혜원씨 지금 기자 하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진짜, 진짜가 뭔지 몰라요? 내가 볼 땐 당신 그런 사람 아닌거 같은데. 여기, 여기 마음 깊은 곳에, 저기 지하실에서 소리가 안 들려요? 네?"      


남자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치면서, 침을 튀기면서 발작하듯이 혜원을 몰아세웠다. 혜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자의 말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당이 신의 말을 옮기는 것 같기도 했고, 기습적으로 찔러 들어온 기다란 칼날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혜원은 남자가 쏟아내는 말들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처럼 아주 살이 가까운 사람이나 해줄 수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힘내, 넌 잘 할 수 있을거야, 같은 따뜻하고 먼 이야기들보다, 훨씬 듣고 싶었던 말들 같았다.      


혜원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한 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빠르게, 운동장을 몇 바퀴 뛴 것처럼 뛰고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혜원은 K감독과 남자의 이야기가 들리자 잠시 멈추고는 엿듣기로 했다.      



"아니, 형 왜그래요?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초면에 무슨... 애를 왜 그렇게 몰아세워요?

제가 아끼는 친군데.. 마음이 여린 친군데.."      


"...나는 이게 쟤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해. 너는 먼저 가 봐.

혜원이는 내가 데려다줄게."     



'제가 아끼는 친구..제가 아끼는 친구...' 혜원의 머릿속엔 그 말 한 마디만 남았다. 혜원은 생각했다. 아낀다는 건 어떤 걸까?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것과는 다르겠지? 내가 만약에 오늘 남자와 밤이라도 보낸다면 K감독은 괴로워할까? 그리고 결심했다.  K감독이 아니라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기로. 혜원의 주량은 맥주 2병이었고, 그날은 맥주 4병을 마신 채였다.        


남자의 혀는 미지근하고 축축했다. 맥주 향기에 안주로 먹은 쥐포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달콤하지도 않았고, 종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혜원은 찝찝하고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첫키스였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하려고, 따스하게 나누려고 아껴두었던 첫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 밤, 면접에는 떨어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리 혼이 나도 알 수 없던 혜원에겐 폭발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완전히 낭비해버릴,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것이 필요했다.


혜원이 남자에게 매달렸다. 많이 취했어도 의식이 남아있던 남자는 혜원의 입술을 거부했지만, 혜원이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볼에 먼저 입을 맞췄다. 그 날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가 캄캄한 초새벽에 신촌의 어느 가로등 밑에서 키스를 했다. 어둠이 부추긴, 절망이 부추긴, 알콜이 부추긴 키스였다. 다음 날 지독한 숙취와 후회를 불러올 게 뻔한, 그 거리에서 수십 번이고 반복되었을 그런 키스.      


키스가 끝나자 남자가 혜원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오늘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K감독이 알게 되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K감독의 후회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럽게도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싫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 사랑 비슷한 뭔가라도 받고 싶었다. 남자가 원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상처입히는 말들이라도 좋으니까, 나를 다 안다는 듯이 굴어주세요. 나를 울려주세요. 제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내 마음에 들어와서 더러운 발자국이라도 남겨주세요.' 혜원은 울면서 남자의 얼굴에 볼을 부볐다.      


남자가 혜원의 손을 이끌어 모텔로 들어가려던 순간, 혜원은 불현듯 아버지의 얼굴이 허공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 고향에서 곤히 주무실 아버지가 새벽의 신촌에 있을 리는 없었다. 슬퍼하는 아버지의 얼굴.


그건 혜원이 불러온 환영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키스를 한 걸 알면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실까. 내가 나를 함부로 남에게 맡겨버린 걸 알면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혜원은 남자의 손을 놓고 뛰었다. 남자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혜원은 택시 뒷자리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혜원은 자신이 혐오스러웠다가, 딱했다가, 다시 혐오스러웠다. 집에 도착해 속을 모두 게워난 뒤 혜원은 깊은 잠 속으로 도피했다. 깨어난 뒤 혜원은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11시에 **카페에서 만나요.’     


남자가 카페에 나왔다. 남자는 커피 한 잔 시키지 않고 앉자마자 혜원에게 말했다. 남자는 어제 일은 너무 큰 실수였다고. 혜원에게 그렇게 말한 것도, 입맞춤도 모두 실수였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 K감독을 비롯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는 사실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그건 K감독도 모르는 일이라고. 혜원의 표정이 굳어갔다.


혜원은 이 세상에 자신의 첫키스를, 비록 사랑해서 한 건 아닐지라 해도, 함께 기억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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