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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Oct 01. 2024

그은 남자_열 한번째 남자

혜원과 12명의 남자들(11)

혜원은 머리를 길게 길렀다. 피부 톤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채로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혜원은 그 사진을 틴더 앱에 올리고 이렇게 썼다. '사랑을 하고 싶어요.' 혜원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바로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다. '데이트 할 사람을 찾아요.'      


화면을 오른쪽으로 넘길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앱으로 얼마든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혜원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이 앱에서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가벼운 여자로 오해하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한 순간의 혜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혜원이 아니기도 하니까 상관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지금 이 순간에 혜원이 원하는 것은 남자였으니까. 그것이 사랑인지, 역할놀이인지, 따뜻한 체온인지, 나눌 대화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인지 아직 혜원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채로, 스물 일곱의 혜원은 스물 다섯의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를 만나기 전 혜원은 어플 안을 헤엄치며 수많은 고초를 치렀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하트, 그러니까 '네가 마음에 든다'는 LIKE를 보내오는 수십 명의 남자들의 존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는 이렇게 인기가 좋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내 혜원은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채팅을 시작하자 마자 신체 사진을 보내오는 남자, 혹은 보내달라는 남자. 근무 중에 야한 이야기를 나누길 원하는 남자. 전혀 다른 사람의 사진을 걸어놓고 만나서는 대뜸 모텔에 가자는 남자. 혜원을 심리상담사로 여기며 자신의 오이디우스 컴플렉스를 털어놓는 남자 등등... 혜원은 어플을 지우기로 결심하고 그 전에 딱 한 번만 더 남자를 만나보기로 한다.      


혜원이 스물 다섯의 한 남자를 만나보기로 한 것은 그가 적어도 채팅에서는 젠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내용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남자는 혜원에게 자신의 대학과 학과, 본명과 연락처를 먼저 흔쾌히 알려주었다. 남자는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으며 그걸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점은 허세를 싫어하는 혜원의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남자는 혜원이 좋아하는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안경을 낀 남자와 만난 첫 날, 혜원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남자는 데이트를 많이 해 본듯 능숙했다. 매너가 좋았고, 혜원과의 대화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혜원도 남자가 마음에 들었고, 자신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반면 남자는 아직 학생이기에 흔쾌히 저녁을 샀다. 남자는 손사래 한 번 없이 혜원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 뒤로도 계속, 남자는 지갑을 꺼내지 않았지만.     


혜원과 남자는 두 번째 만남에서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혜원은 이후에 영화 내용을 도통 기억할 수가 없었는데, 남자가 혜원의 손가락을 애무하고 귓속말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혜원은 그런 식의 신체적 접촉을 처음 겪어봤다. 하반신이 독감에 걸린 것처럼 뜨거워졌고 정신은 허공에 붕 뜬 것 같았다.


둘은 영화관을 나와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밤길을 걸어가는 동안 혜원은 정신을 차리자고 생각했다. 남자가 혜원을 좋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원하고는 있는 것 같았다. 혜원만 마음을 먹는다면, 아마 오늘 밤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였다. 혜원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첫 번째 섹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해도 괜찮겠어?'      


혜원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 또래 친구들은 몇 번이고 연애를 하며 첫 경험을 했다는 나이. 혜원은 이제 자신의 처녀성이 거추장스러웠다. 세상은 그것을 아주 값지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경매에 붙이는 듯 보였지만 혜원에게 그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먼지 쌓인 골동품 같은 것으로 남아있었다.


이걸 덜어내버리고 나면,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스물 일곱의 혜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둘은 허름한 모텔로 향했다. 그 밤, 남자는 혜원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무척이나 긴장한 혜원이 완전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보다 두 살 많은 혜원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때 혜원은 그 감촉이 너무나 또렷하고 생경해서 이마의 살갗이 아플 지경이었다.      


둘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 남자는 새근거리며 긴 잠에 들었다. 모르는 남자의 잠에 든 얼굴, 혜원은 그것을 처음 보았다. 긴 속눈썹과 긴장이 풀린 표정이 남자를 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혜원은 낯선 남자가 잠든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혜원이 잠시 선잠에 들었다 깨었을 때는 작은 창문으로 해가 들이치고 있었다. 아침 8시였다. 자는 남자를 두고 혜원은 짧은 쪽지를 한 장 썼다. '깊이 자고 있어서 안 깨우고 먼저 가. 또 만나자.'


혜원은 대낮에 남자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혜원은 옷을 급히 갈아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낡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모텔 문을 열고 나서자 환하고 밝은 빛이 혜원의 눈을 찌르듯 들이쳤다. 혜원은 그만 발목을 얕게 접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은 꼭 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같았다.      


그 날 이후로, 혜원에게는 남자가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남자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했다는 은근한 죄의식과 섹스 이후로 저 남자를 애틋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들이 뒤섞여 소화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남자에게는 혜원이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되었다. 남자는 가끔 혜원을 찾아왔다. 섹스는 했지만 혜원의 방에서 잠을 자고 간 적은 없었다. 남자는 수업이나 과외,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을 때나 돈이 다 떨어졌을 때 혜원을 찾아와 밥을 사달라고 했다. 하지만 혜원은 남자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을 만큼이나, 남자와 살을 맞대고 있으면 전해져 오는 온기가 간절했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혜원은 몇 가지를 더 원하게 됐는데, 남자는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낮에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것이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는 것. 섹스를 할 때 눈을 마주보는 것. 다정한 일이었고, 연인의 일인 행위들이었다.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혜원이 이유를 물었을 때, 남자는 그것이 혜원에게 상처가 될 것은 조금도 모른다는 듯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까? 누나는 못생겼으니까. 밖에서 손잡고 다니기는 부끄럽거든. 그리고 난 누나랑 할 때 전여친 생각해. 그래서 눈을 감는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실없이 웃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뺨을 한 대 날려줬더라면 속이 시원했을텐데. 혜원은 시간이 지난 뒤에 이렇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 때의 혜원은 별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어 넘기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만 말했다.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남자를 몇 번이나 더 만났다.    

  

남자와 몇 번의 섹스를 더 하는 동안, 혜원은 이전과 달리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일상을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남자와 혜원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존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혜원은 자신이 고깃덩어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혜원은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를 원했다. 혜원은 함께 손을 잡고 밝은 빛 속을 산책할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혜원은 자신이 그런 것을 원해도 되는 여자인지 이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혜원은 남자의 연락처를 지웠고 차단했다. 그러나 남자가 했던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말들은 혜원의 몸을 날카롭게 긋고 지나갔다. 혜원은 머리를 다시 길렀다. 검색창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검색했고 예쁜 옷을 사들이는 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혜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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