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점검이 필요할 때
쓸 때 없는 망상이 줄을 잇는다. 조작된 것 같은 외로움도 기어코 올라온다. 오래간만에 매일 하던 일을 멈춰서인지 전시 같은 걸 한 탓인지. 우사단로에서 오붓하고 시끌벅적했던 열흘 간의 행사가 끝난 어제 하루 종일 우울이 방바닥을 긁었다.
때마침 연락하는 지인마다 일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월요일에 당장 저녁에 무엇을 하냐고 물으면 할 일이 10만 개 인 게 서울 사람들인 것을) 형이 보고 싶어서, 내 생일도 기념할 겸, 그냥 생각나서 등등 이유도 궁색 맞았는데 다 거절당하니 더 궁상맞았다. 날씨는 왜 또 추적추적한 지. 거의 2주간을 쉼 없이 감기와 함께 달렸으니 전시가 끝난 다음 날 하루만이라도 맘 편히 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번에는 내 마음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지인이 일하는 맥줏집에서 혼 술을 가장한 안주 얻어먹기를 시전 한 후 집에 일찍 들어왔다. 옆 방에 대만에서 왔다는 게스트들은 아직 열 시 밖에 안되어서 인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밀가루 음식에 맥주까지 가득히 먹으니 속이 좋질 않다. 그나마 취기를 배게 삼아 머리를 침대에 박아본다. 잠인지 멈춤인지 모를 것이 다가와 잠시 의식이 흐려진다. 그리고 몇 시간이 안되어 다시 눈을 뜬다. 그토록 바라던 휴일인데 나는 왜 쉬질 못할까?
190에 가까운 큰 키에 오뚝한 콧날. 그리고 지적인 이마 주름에 포근한 안경이 인상적이었던 베를린 태생 대학생 루카스는 내게 다시 한번 이렇게 물었다. 내게 라이프 셰어를 처음 알려준 친구였다.
꽤나 철학적인 질문을 많이 주고받은 우리였는데, 그것에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 라이프 셰어라는 캠프도 만든 나인데, 또다시 그의 청아한 물음에 말문이 막힌다.
"미래라니, 무엇을 말하는 거야?"
"미래, 아무거나, 앞으로의 생각하는 것들 말이야."
그가 처음 내 방문을 두드렸을 때처럼 표정은 심플하기 그지없다. 마치 '어제 저녁에는 뭘 먹었어?'라고 묻는 것 같다. 난 험험. 애꿎은 헛기침을 하고 시간을 끌어본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그의 맑은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이내 눈을 내려 깔고는 준비되지 않은 입을 떼어본다.
"머, 다 비슷한 거 아니겠어?"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좀 정착되었으면 좋겠고, 내가 좀 평온해졌으면 좋겠어. 블라블라..."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상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참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이게 그를 향한 말인지, 나를 향한 말인지 분간이 안 간다. 마치 아무도 없는 잘 차려진 무대 위에 나 혼자 독백을 하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말을 하며 오히려 조금씩 익숙해졌는지 속 깊은 이야기들을 퍼올렸다. 일상을 살 때는 그런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말이었다.
얼마나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짧게는 1~2분? 길게는 5분 정도 흘렀을까.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 눈 앞에 여전히 낯선 유럽인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을 다시 돌아보니 내가 수없이도 왔었던 합정동에 작고 낡은 호프집이었으며, 우리 앞에는 따끈한 치킨 한 마리가 도착해 있었다. 그가 무슨 답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끄덕임과 눈빛 만으로도 난 충분했다.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사람이 하는 고민과 놓인 상황은 참 비슷했다. 우리는 언제 그랬냐듯 또 한참 동안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속 깊은 대화에는 생각보다 인트로가 필요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2~3시간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정말 깊고 알찬 대화를 나눴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나와 처음에 합정동에서 만나고, 다시 베를린에서 만났고, 이제는 신촌에 살고 있는 루카스이지만 우리가 어느 공간에 살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 만나도 새로운 곳에 있는 것 같고, 또 함께 있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게 그런 질문을 해준 루카스에게 고마웠다.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게
그런 질문을 해주어서 고마웠다
다시 돌아와 전시 후유증으로 우울과 불면을 겪고 있는 내게 스케쥴러는 다시 한번 그러한 시간이 내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1월 25일 목요일 저녁. 바쁘디 바쁜 서울에서 더욱 논리와 자본의 심장인 강남역 한 복판에서 이상한 이벤트가 열린다. 빈브라더스와 함께 준비한 '라이프 셰어' 이벤트이다. 그날만큼은 호스트(또는 가이드)가 아닌 참가자로 들어가서 나의 이야기도 훌훌 털어버리고 싶지만, 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그 시간을 기다려본다. 삶에서 일도 좋고, 축제도 좋고, 전시를 여는 것도 좋지만 무작정 이리 달리기만 하면, 다시 한번 이렇게 우울감에 빠지겠지. 그러니 가끔은 이런 점검이 아주 좋다. 게다가 맛있는 커피도 준다고 한다!
이벤트를 나보다 더 세밀하게 준비해준 빈브라더스 마케팅팀과 책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휴머니스트 덕분에 평소보다 더 편안하고 정교한 시간이 될 것이 뻔히 보인다. 강남 인근에서 일을 하며 나처럼 알 수 없는 우울과 마음의 이상한 징조가 있는 사람들은 빈브라더스 강남점에 들려 각자의 인생 이야기 또는 철학을 나누는 카페에서 2, 3시간 쉬어가면 어떨까. 그 정도 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점검할 수 있다.
아, 예약은 무려 29CM에서 진행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