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겨울에 오는 사람은 바보야

우기에 비 맞으며 여행하는 것

by 제피

https://www.youtube.com/watch?v=0CS8qFgFHxU

그칠 때만 되면 또 다시 비가 내리네




베를린을 겨울에 오는 사람은 바보야. 베를린의 겨울은 끔찍해.




우리는 날씨에 예민하다. 장마를 제외하면 비가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나라에 사는 우리는 비 예보가 두 번 이상 있으면 ‘이번 주는 날씨가 안 좋다’라고 정해버리곤 한다. 적당히 내리는 비의 중요성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사랑하기 힘들다(농사짓는 분들께는 죄송하다). 가끔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이상한 낭만에 빠진 게 아닐지 생각하기도 한다.



날씨는 여행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강수량에 따라 멋대로 성수기와 비수기를 구분한다. 유럽의 여름은 비가 안 오고 맑고 쾌청하기 때문에 성수기, 겨울은 흐리고 비가 자주 와서 비수기. 동남아시아의 여름은 툭하면 스콜이 쏟아져서 비수기, 겨울은 비가 안 와서 성수기. 우리는 날씨만 보고 여행지의 매력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깎아내리곤 한다. 유럽의 겨울은 너무 우울해. 비 앞에서 여행지는 억울한 누명을 쓴다.


20190203_043758_IMG_7595.HEIC 유럽의 겨울은 너무 우울해. 비 앞에서 여행지는 억울한 누명을 쓴다.



콜롬비아를 여행하면서 한 독일 청년을 만났다. 우리는 메데진(Medellin)으로 가고 있었고 콜롬비아에서의 계획과 이유 없이 막히는 이 나라의 도로 사정을 불평하며 말을 붙였다.

“너 서울에서 왔어? 나도 가봤지. 재밌는 게 너무 많아. 세상의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아.”

“그래도 독일만큼 맛있는 맥주와 소시지는 찾기 힘든데. 너는 어디 사는데?”

“난 베를린(Berlin)에 살아. 베를린도 갈 거야?”

“아니… 유럽은 여행 안 하려고. 물가가 너무 비싸서.”

“그래도 베를린은 런던(London)이나 파리(Paris)에 비하면 싼데… 아니다, 이제 여름도 다 지났으니 베를린은 다음에 와.”

“왜?”

“좀 있으면 겨울이잖아. 베를린을 겨울에 오는 사람은 바보야. 베를린의 겨울은 끔찍해. 춥고, 맨날 비 오고, 축제도 없고, 사람들의 표정엔 웃음이 없고. 그리고 해도 짧고. 여기 사람들 겨울엔 다 스페인으로 놀러 가. 그게 현명한 거지.”

“하하, 그런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해. 그래도 한국에선 겨울에 유럽 여행 가는 사람이랑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진짜 많은데.”

“세상에, 아이스크림 먹으며 공원 의자에 앉아 놀지도 못 하는데…”



이전에도 베를린을 겨울에 오는 사람은 바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다른 두 곳에서 같은 말을 들을 정도면 진실이라고 믿어도 됐다. 나는 베를린이라는 곳을 모르지만, 그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찬 곳임은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겨울에는 느낄 수 없는 걸까. 단지 춥고 비가 자주 온다는 이유로. 한참 후 콜롬비아 여행을 마치고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말이 기억났다. 베를린의 겨울은 끔찍해… 여기 사람들 겨울엔 다 스페인으로 놀러 가. 그게 현명한 거지… 맞은편 탑승구에선 프랑크푸르트(Frankfurt)행 비행기의 탑승이 이뤄지고 있었다. 우린 지금 겨울이라는 이유로 일 년의 절반을 외면받는 도시로 간다.



여름의 런던은 부족한 게 없었다. 덥지 않고 적당한 기온,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건조함, 하루에 18시간이나 우리를 조명해주는 태양, 이 계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온 사람들, 그들의 이마에 맺힌 희미한 땀 한 방울… 흐리고 추운 콜롬비아를 떠나 도착한 런던은 도시 전체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다리에는 빅 벤을 배경으로 담으려는 세계 모든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 시럽을 버무린 땅콩을 3파운드(5천 원)에 파는 노인, 화려한 야바위로 뜨내기 관광객의 돈을 노리는 사기꾼으로 가득했다. 나는 런던에 도착해 짐을 풀고 숙소 앞 거리를 걸으며 감탄했다. 아무리 여행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행위라고 해도 런던은 오직 여름이라는 이유로 완벽해 보였다. 그래, 이 정도라면 성수기라는 핑계로 돈을 더 줘서라도 오고 싶어 할 거야. 런던의 완벽한 날 나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에 만족하며 빨간색 2층 버스의 계단을 오른다.


20220716_155841.jpg 아무리 여행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행위라고 해도 런던은 오직 여름이라는 이유로 완벽해 보였다.



여름을 보내고 유럽의 축제가 끝났을 때 나는 자카르타(Jakarta)에 도착했다. 자카르타는 건기에도 비가 적지 않게 오는 도시긴 하지만 내가 머물 가을이라는 계절은 본격적인 우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하룻밤을 보내고 창문으로 바라본 자카르타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작고 가벼운 우산으로 도저히 이 비를 뚫고 유심을 사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인터넷 없이 도시를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자의 우산은 매우 작거나 없다. 우산이 들어갈 공간은 여행자에게 사치다. 유럽인들은 아예 우산과 가방에 씌울 덮개도 없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으며 여행한다. 그들은 비 앞에서 옹졸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유럽인이 아니다. 나는 가랑비에도 우산이 잘 팔리는 나라 출신이다. 네가 선택한 여행지야. 이런 것도 모르고 온 것도 아니잖아. 빨리 나가서 뭐라도 보고 훔쳐. 그게 네 일인걸? 마음을 고치고 밖으로 나선다. 우산은 작고 볼품없다. 방패 대신 냄비 뚜껑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있다면 바로 내가 아닐까. 30분의 외출 후 나는 구정물로 바지를 흠뻑 적신 채 돌아온다. 바지를 대충 비누로 빨고 말리며 자카르타를 떠날 생각을 한다.



반둥(Bandung)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그랩으로 바이크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기사가 도착했을 땐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헬멧으로 머리만 비를 피하며 생각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축축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 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긴 할까? 숙소에 도착해 테라스에 앉아 배달시킨 야식을 기다리며 우기에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지연과 게으름이 좋아서? 비를 핑계로 그것들을 더 보고 싶어서?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왜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건지는 알 것 같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부딪치며 생기는 동그란 파도가 예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걸음을, 놓고 온 것을, 잃어버린 것을, 비가 오지 않았다면 더 아름다울 것을, 비가 와서 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비는 그럴 시간을 준다. 때로는 하루 종일 생각하도록 우리를 방치하기도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씨 좋은 자카르타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비가 와서 우울한 런던 역시 상상해본다. 비수기라는 누명 아래에 드러나지 않을 것들의 모습을. 그건 진짜도 가짜도 아니다. 왜냐면 둘 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겨울의 베를린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원 의자에 앉아 놀지 못하겠지만, 여름이라면 놓쳤을 것들을 겨울이기에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우울한 날씨, 우기, 비수기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거치니 비 오는 날씨가 밉지 않아졌다. 배달시킨 나시고렝(Nasi Goreng,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을 다 먹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오늘은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없다. 처음으로 비와 고립된 공간을 아쉬워한다.


비수기라는 누명 아래에 드러나지 않을 것들의 모습을. 그건 진짜도 가짜도 아니다.



한국의 청명한 겨울에 비에 대한 글을 쓰다 접어두고 잊어버린 기억이 펼쳐졌다. 에콰도르의 쿠엔카(Cuenca)에 머무는 6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왔다. 이곳에서 맑은 하늘을 본 기억은 없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방 밖에 있어서 가는 동안 항상 비를 맞았다. 그런 곳에서 가녀린 우산을 쓰고 내가 본 건, 미사를 끝내고 성당에서 나와 한 우산을 같이 쓰고 옷이 젖지 않게 서로 몸을 맞대며 가는 한 모녀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에 살냄새가 묘하게 배어 있었고 우산에 튀기는 빗소리는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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