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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작소 Jun 08. 2018

'원래 그래'와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의 사이

아이는 엄마의 씨앗

"아기가 머리가 커서 늦게 걷는 거 아니야?"

"아기 머리가 크면 늦게 걸어? 태어날 때부터 좀 크긴 했는데... 처음 듣는 소리긴 하다."

걸음이 주변 아이보다 늦었다. 
첫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고생을 시키더니, 걸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게 너무 늦었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조카아이는 이미 달리기도 한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핑크 신발을 신고 요리조리 뒤뚱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게 예뻤지만, 내 마음 한편은 아이의 닳아빠진 무릎 보호대 천 쪼가리처럼 불안이 덜렁 거렸다. 

"언니, 남자애들은 늦되대. 설마 못 걷겠어? 걱정 마. 머리가 커서 그럴지도 몰라. 무거워서 말이야. 우리 앤 너무 빨라서 뼈에 안 좋을까 걱정이야."
위로인지 자랑인지 모를 동생 말이 귓 가에서 또 한 번 불안을 건드렸다. 
'머리가 좀 큰데... 정상인 거 맞나?'
지금에야 인터넷 서칭으로 금방 찾아서 전문가 상담이라도 하련만, 이십여 년 전의 인터넷 정보는 고물 책방에 묻혀있는 육아서 보다 부족했다. 
오죽하면 아기를 둘러없고 강 건너 그 당시 유명한 소아과를 찾았을까.
하긴 전문가가 '육아서에 기대지 말고 기다리라'라고 하는 말도 믿기지 않았으니 아이가 걷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았을 일일는지도 모른다. 

혹시,  기는 것에 익숙해져서 일어나려는 의지를 갖지 않는 건 아닐까?
보행기가 발달을 방해하는 거 아냐?
안아주는 횟수가 문제인 건가?
내가 태교를 잘 못해서 유전자가 이상해 진건 아니겠지?

주변보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불안은 정상을 넘어 유전자 변형에까지 가닿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불안이 너무 당연했다. 
아기한테는 내가 엄마지만. 나도 엄마는 처음이니까. 
지나고 보니 건강한 엄마들은 누구도 첫아이에 대한 불안에 자유롭지는 않은 듯하다. 
걸음이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사춘기가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또 느린 대로 '불안'이나 '염려'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나고 나서는 보이는 것들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먼저 키워본 선배 엄마가 괜찮다고 말을 해 주어도 도리어 '당신이 내 마음을 알겠냐'라는 생각에 서운했던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이의 발달 속도가 엄마의 기대 속도와 같지 않았다!


"일어섰어. 드디어 일어섰어." 
15개월이 넘어서야 테이블을 잡고 일어섰다. 
마음이 급해서 한두 발짝 떼게 도와주려고 해도 엄마의 마음뿐인 건지 아이는 털썩~그대로 주저앉는다. 
엄마 마음은 몰라주고 눈을 마주치면 헤실~하고 미소를 띤다.
잡고 일어서기부터 걷기까지 또 기다림인지 불안인지 모를 덩어리들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반복을 한다. 
이제 주변에 물어보기도 지치고 체념이 되었다.  
괜스레 아이를 믿어주지 못하는 못난 엄마가 된 것 같고,  그것은 자책의 화살이 되어 내 마음에 다시 꽂힐 테니.

"다 그래, 못 걷는 경우가 어디 흔해? 걱정할 일도 많다. 괜찮아, 원래 그래. 애들은 모두 언젠간 걷고 뛰고 자란다니까"
돌아올 대답은 뻔하고 나의 불안은 공허하게 내 주변만 맴돌 뿐이다.
뒤집기도 늦고, 걷기도 느렸던 큰 아이는 스무 살이 넘은 지금도 어딘가 늦되다.  
다른 아이들은 중학교 2, 3학년 때 고민했던 것들을 고3이 되어하면서 나를 또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도 했다. 
아이는 돌다리도 두드려서 걷는, 안전을 추구하는 성향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아도 여전히 나는 어느 정도의 불안을 안은 채 성인으로의 첫걸음을 떼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지나고 보니 선배들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걸었고, 뛰었고, 또 컸다.
6개월 빨리 태어나 핑크빛 부러움을 줬던 조카는 (성별이 달라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은 내 아이보다 체구도 작고 달리기도 느리다. 

모든 것은 '괜찮았고 원래 그런 것'이었다.

어느 책에선가 엄마는 아이의 씨앗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엄마의 상징인 자궁을 빗댄 돌봄에 대한 뜻이었을까.
그런데 도리어 나는  아이가 엄마의 씨앗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선배 부모가 '괜찮아, 원래 그런 거야.'라는 안심을 주어도, 처음 엄마가 된 나는 '육아서 평균'이 무색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나 같지 않은 경험을 하게도 된다.  
낯설고 새롭다.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들 쑥 날 쑥 하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괜찮아'가  '어쩌면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과 염려를 안은 채,  내 아이가 온몸으로 말하는 '언어'를 읽으려고 애썼다.  
아이의 속도를 맞춰가며 보폭을 맞추는 것도 내 아이와 나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육아서나 선배가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랑 내 아이가 걷는 걸음걸음이 진하게 발자국을 남겼다.  
그것은 그들이 말했던 '원래 그런 거야, 괜찮아'처럼 모양은 비슷하지만 내 아이와 나만의 경험은 내 삶에 특별한 색깔로 콕콕 박혔다. 
예상치도 않게 아이가 씨앗이 되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자라게 했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어떤 모양의 나무로 자라게 했다.

오늘 낮에 만난 한 엄마가 나에게 어둡고 시무룩한 얼굴로 발달이 늦은 아이에 대한 고민을 한참 털어놓았다.
"언니도 그랬어요? 아이가 늦는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요즘 너무 힘들어요."
"응, 원래 그래. 기다리면  돼."라고 말해서 안도를 주고도 싶지만,
 "아이 키우기 어렵고 많이 걱정되지? 그 맘 때가 제일 힘든 때인 것 같아. 최선을 다 해도 항상 모자란 것 같이 느껴지더라고, "라는 말로 줄였다. 

'원래 그렇다는 것'과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사이에서 하는 고민하는 동안  발견하게 될 아이가 주는 값진 씨앗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빼앗을 수 있을까.                                                                 

                                                                   © rawpixel,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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