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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다희 Dec 17. 2020

캐나다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그렇게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회사 송년회도 무사히 마치고 크리스마스를 지나 어느새 2019년이 끝났고, 순식간에 2020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연초부터 좋지 않은 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1월 초부터 1차 대유행이 시작되어서 이미 비상 상황이었던 반면에, 캐나다에서는 아직 의심환자나 확진자가 없었다. 그리고 캐나다 정부에서도 바이러스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신중하게 대처하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나는 그래도 캐나다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다른 캐나다 사람들도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그저 뉴스거리일 뿐 캐나다는 중국과 멀어서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1월 말에 처음으로 캐나다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났고, 3월 WHO에서 팬더믹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확진자가 늘어나도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끝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WHO에서 팬더믹(Pandemic) 선언을 했고,



캐나다도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재기! 사재기! 사재기!"


팬더믹 선언이 뜨고 곧 봉쇄 조치(Lockdown)에 들어갈 것이라는 뉴스가 뜨자마자 사람들이 마트로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룸메들도 나를 불러서 1분이라도 빨리 마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봉쇄 조치가 시작된다고 해도 마트가 문을 닫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식료품 마트는 세계 어디서나 필수 업종이기 때문에 시간을 제한할지언정 문을 닫으면 국민들 먹거리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캐나다 사람들은 우리랑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캐나다 정부에서 식료품 공급에는 문제가 없으니 사재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은 너도나도 마트로 몰려들어서 식료품과 각종 가정용품들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수요가 높았던 물품은 쌀도 아니고 빵도 아니라 다름 아닌,



화장지, 두루마리 휴지(Toilet paper)였다.


이 휴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실로 치열했다. 내가 가봤던 몇몇 드럭 스토어에는 이미 휴지 코너가 텅텅 비어있었고, 그 와중에 직원이 새로 휴지 제품들을 다시 채워 넣자마자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금방 바닥이 났다. 수요가 이렇게 높으니 가격은 올라갔고, 사람들은 가격이 오르든 말든 휴지를 계속 사재기했고,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서 똑같이 사재기를 하고,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옆 나라 미국에서는 이 휴지를 서로 가지려고 마트에서 싸웠다는 뉴스까지 방송되었다.



사실 이해가 휴지가 필요한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봉쇄 조치가 시작되면 자가격리 혹은 집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휴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비데로 씻고 말리면 덜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물어보는데, 캐나다가 한국처럼 비데가 기본인 나라는 아니어서 비데가 없는 집도 많다. 내가 사는 콘도도 비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재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사질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니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가져온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합시다!'




"재택근무의 현실"


온타리오 주정부가 봉쇄 조치를 시작하면서 필수 업종 이외의 사업체들은 재택근무를 할 것을 요구받았다. 내가 일하는 은행과 스타벅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가게와 지점에서 일하던 나는 솔직히 재택근무를 할 수가 없는 직무였다. 은행 지점은 필수 업종이라 문을 닫지 않았고 재택근무는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지점 내 직원들의 경우는 회의 결과, 지점 운영을 계속하되 일부 인원을 돌아가면서 재택근무를 시키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지점 직원들의 경우 업무의 대부분이 내점 고객을 상담하면서 민원 해결과 수신 상품 영업, 대출 상품 영업 등 고객을 직접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상 재택근무를 할 때, 동료분들에게서 내 담당 업무에 대한 전화가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업무가 없었다. 다만 평소랑 똑같이 일어나서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집에서 항상 문의 전화가 오는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수 업종이라 지점을 계속 운영하는 대신에 운영 시간이 대폭 축소되었는데, 원래 9시 반에 오픈해서 4시 30분에 문을 닫던 운영 시간이, 10시부터 4시까지만 운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았지만, 해야 할 업무들의 양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근무시간이 더욱 정신없이 타이트하게 흘러갔다. 다른 로컬 은행 지점들은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일부 거점 지점만 운영했는데, 그 때문에 은행 앞에 줄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스타벅스의 경우에는 팬더믹 선언 이후 드라이브 스루가 있는 가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를 휴업 조치시켰다. 내가 일하던 가게도 그 구역 내에서 가장 매출이 잘 나오는 가게였지만 드라이브 스루가 없었기 때문에 휴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대신 스타벅스 본사에서 휴업으로 인해 일을 못하게 된 바리스타들을 위해 Catastrophe Pay, 일종의 재난 지원금 차원의 보수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스케줄 상 근무했던 시간의 평균만큼 시급을 계산해서 월급을 주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을 안 해도 당분간 굶지 않게 돈을 주겠다는 의도였다.



역시 대기업은 대기업이었다.


덕분에 가게는 휴업을 해서 근무는 없었지만, 내 통장에는 스타벅스에서 한 달에 약 50만 원씩 돈이 들어왔다. 나중에 5월 말에 다시 가게가 오픈을 했으니 2달 동안 근무 없이 월급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다시 가게를 오픈하자마자 손님들이 스타벅스로 잔뜩 몰려왔는데, 마스크를 안 쓰고 들어오는 손님들이랑 실랑이를 했던 게 너무 피곤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코로나가 퍼지기 전까지는 이민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고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에 대처하는 캐나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저 독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스크를 안 쓰려고 하는 사람들, 마스크를 쓰던 나를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 봉쇄를 반대하는 사람들, 안이한 대처 등등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전부 겹쳐서 어느 순간부터는 캐나다가 한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하루에 수 천명씩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다. (대도시 토론토는 2020년 12월 17일 하루 확진자가 약 850명이 나왔다.)



또한 이 바이러스로 인해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나 역시 평생 캐나다에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는 인종차별을 당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던 길에 바로 앞에 앉아있던 중동계 남자가 나에게 갑자기 "너 여기 왜 있냐?"라는 말을 들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는데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너 생긴 거 보니까 중국에서 왔네. 바이러스 가지고 있잖아. 언제 왔어?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왜 중국인이라 생각하냐고 물으니 그냥 생긴 게 중국이라고 말하는 거 아닌가. 캐나다에 영어 차별은 있을 수 있어도 인종 차별은 없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내 앞에서 벌어지니 어이도 없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맞받아치면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그냥 이어폰을 끼고 무시했는데, 나중에 내릴 때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뭔가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 기억난다.



'과연 내가 한국에 있는 한국인이었어도 이런 일을 겪었을까?', '도대체 내가 남의 나라에 와서 꾸역꾸역 영어 하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그나마 남아있던 캐나다의 정까지 뚝 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마지막 이유로는 더 이상의 커리어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당시 내 취업비자는 1년에서 1년 3개월 정도 기간이 남아있었다. 영주권을 신청하려면 특정 레벨 이상의 직군에서 풀타임 정규직으로 최소 1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어야 신청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려면 이직을 했어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채용 시장이 얼어버려서 그럴 기회조차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당장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한국이었다면 현 직장에 당분간 머물면서 기회를 엿볼 수도 있겠지만, 취업비자를 받아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인 나에게는 언제 나아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게 될 한국이라면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가족들과 상의한 후 귀국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퇴사를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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