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먼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표하면 그제야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애초에 이상형이라는 틀도 없던 나는, 특별히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군가 내게 보여주는 지속적인 애정에 마음이 끌렸다. 사람이 내게 보여주는 따스한 감정, 눈길, 손길이 좋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받는 애정에 익숙해지면 나 또한 되돌려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빚지기 싫어하는 성향이 강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으며 거침없이 불태웠다. 격정적인 사랑을 했다. 모조리 내어주었고, 그만큼 받고 싶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유연하게 조절되지 않는 내 사랑에 상대방이 질려 도망갈 즈음엔 내가 매달리기도 했다. '네가 먼저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럴 때 나는 이성을 잃었다. 구질구질하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잡았고, 화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되돌리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꼭 그 사람을 원했다기보다, 그 사람에게 받아왔던 사랑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싶다. 익숙해진 사랑이, 관심이 사라지는 것이 싫어 울고불고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나면 오래 아파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깨끗하게 잊었다. 왜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던 과거의 존재는 지워졌고 사랑이 불타고 난 자리엔 흐릿한 재만 남았다.
어느 날 글을 쓰는 사람들과 덕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한없이 베푸는 것만으로도 내면이 충족되는 감정에 대해 들으며 내 안의 결핍을 엿보게 되었다. 인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고,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에 익숙한 나는, 덕질은커녕 짝사랑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이라니, 몸만 컸지 내면은 자라지 않은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감정을 누르고 참으며 애썼던 일이 있던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보듬었던 적이 있던가. 내 감정에 휩싸여 앞이 보이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십 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이 혼인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이 내게 보여주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컸기에 가능했다. 감정의 높낮이가 커, 거칠었던 감정과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컸던 내가, 보편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낼 수 있게 된 데엔 남편이 내게 지속적으로 보여준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남편은 울퉁불퉁하고 모난 내 옆에서 한결같이 나를 이해하고 보듬고 응원했다. 남편이 내게 보여주는 사랑은 어쩌면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사랑과 결이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생활을 지속하며 늘 반문했다. 나는 남편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가. 고개를 내젓는다.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남편은 이런 내 성향도 알고 있을까. 안다면, 어떻게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내게 있어 아이는 다른가. 아이를 낳았을 때, 모성애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예쁘고 귀엽지만, 동시에 나를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족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아이에게 내가 받은 사랑이 더 크기에, 아이를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이는 내가 뿔난 도깨비처럼 화를 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은 눈으로 꾸밈없이 나를 사랑하고 필요로 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를 때면 내면에 새카만 공허함이 남는다. 타인에게 애정을 구걸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아낌없이 사랑하며 생생한 에너지를 얻는 편이 삶에 있어서 더 이로울 텐데. 나는 어쩌자고 이런 인간으로 지내는 걸까…….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했을까.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있기는 할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음에 소리 없는 먹먹함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