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은 길었고, 마침내 끝났나 싶더니 새 학기에 맞춰 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큰아이를 마냥 놀릴 수는 없었다. 나날이 자라는 아이의 재능과 관심사를 알아내야 했고, 교과 진도에 따른 학업 수준을 확인해야 했으며, 그에 맞는 학원을 찾아봐야 했다. 하지만 학원은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이의 수준을 테스트하는 시험을 봐야 하고, 시험을 보는 날짜를 조율해야 한다. 레벨테스트를 통해 아이의 학업 수준을 확인했다고 해서, 바로 학원에 다닐 수는 없다. 유명한 학원의 경우 대기하는 학생은 존재한다. 집에서 가깝고, 원하는 학원을 등록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새로 등록한 수학, 영어학원의 스케줄에 맞춰, 큰아이가 몇 년째 다니고 있는 피아노학원과 태권도학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피아노와 태권도만큼은 꾸준히 가르치고 싶었다. 공부만 하면 스트레스는 언제 풀까 싶기도 하고, 이왕 배운 거 몸에 익을 때까지 꾸준히 배우는 것이 좋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릴 적 피아노를 5년 배웠으나 너무 빨리 그만둔 탓에 어른인 지금 유연하게 연주할 수 없는 악기가 없다는 사실이, 나는 몹시 아쉽다.)
큰아이는 집 근처의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별다른 불만 없이 다니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전에 그날의 숙제를 꼬박꼬박 했다. 기특했다.
이번 주는 방과후학교 수강 신청을 정해야 했다. 일 년에 4분기로 접수하는 방과후학교는, 내 경우에는 시간표 조율이 어려워 1분기에 정해둔 수업을 보통 학기 말까지 이어가곤 한다. 그래서 신중하게 두 아이의 취향을 고려하고, 평소 다니는 학원 시간을 조정하여 새로운 수업을 신청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신경이 많이 쓰인다.
큰아이는 3D프린터 수업을 듣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큰아이는 올해 학교에서 운영하는 수‧과학융합영재학급을 지원했는데, 시험을 보고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신청하는 학생이 많지 않아 대부분 합격하는 모양이었다. 그 시간대엔 영재학급 수업이 겹쳐서 신청할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큰아이에게 얼마 전 취재 다녀온 서울퓨처랩이 생각나 제안을 했다. 서울퓨처랩은 초등고학년 학생 대상으로 서울시에서 만든 4차산업혁명체험센터인데, 드론이나 로봇 등 학습과 동시에 체험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큰아이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퓨처랩은 주말 예약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평일로 예약했다. 대신 복잡해진 스케줄 정리는 내가 처리했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학원에 전화하여 보충수업을 잡고, 남편에게 휴가를 내도록 종용하였다. 남편에게 세 가지 체험 스케줄을 세 번 브리핑했다. 어째서 이 남자는 한 번 설명한 걸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하고 또 질문할까. 남편과 아들이 서울퓨처랩으로 갔다. 한 가지 체험을 끝내고 큰아이가 아빠의 전화로 화상전화를 요청했다. 아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띈 것을 보니 뻐근했던 등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젯밤 아이가 책을 보다 뜬금없이 방과후학교 중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책을 읽다 보니 한문과 중국어가 나오는데, 뜻을 모르니 알고 싶다고 했다. 무언가 몰라서 느껴지는 답답함을 배움으로써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이에게 생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있는 힘을 짜내어, 학원에 다시 전화했다. 그리고 시간표를 또다시 조정했다.
늦은 밤까지 여러 선생님께 연락하여 시간표를 조율하다 보니, 피곤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3월은 이렇게 조율과 조정의 연속으로 혼합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통 혼자 생각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매일매일 큰아이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는 둘째 아이 일정에 맞춰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와, 딸의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가고, 산책길에 딸이 자신의 일과와 생각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친구에게 언제 고백할지에 대해 쉼 없이 조잘거릴 때, 맞장구를 쳐주다 보면, 도저히 내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어서 이 정신 사나운 적응의 시기가 안정권으로 들어서길 바라고 있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