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망원동의 화실에 초대받았다. 코로나 시대를 줌으로 함께 한 미술사 선생님의 오픈 스튜디오 마지막 날, 우리는 브런치를 함께 하기로 했다.
화실의 첫 번째 방문에 무엇을 선물할까 하다, 이번엔 루아르 지방의 상세르 소비뇽블랑을 선택한다. 산미 있는 와인을 좋아하는 나는,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의 와인보단 루아르 지방의 와인을 더 좋아한다. 선생님은 어떤 와인을 좋아할지 궁금해하며, 와인 병목에 버건디 컬러의 끈을 리본으로 묶는다.
선물의 꽃은 리본이다. 선물이 빛을 발하려면 리본을 푸는 과정이 필요하다. 소소한 것에 의미를 두고 요란하게 선물하는 자의 즐거움이랄까. 가벼운 선물이지만, 화려한 리본도 아니지만, 리본을 풀며 상대방에게 들뜬 마음이 전염되길 바라는, 선물하는 자의 마음이 바로 리본에 숨어있다.
2.
지하철을 탔다. 집에서 먼 길을 떠날 때는 대중교통과 직접 운전하는 것을 두고 오래 고민한다. 대개는 대중교통을 선택한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운전이 귀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 어느 순간에 취하고 싶을지 모르는 자에게 자동차란 버릴 수 없는 짐이다.
6호선을 타고 망원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평소 타인의 통화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낯선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다시 귀를 사로잡는다.
- 응, 000에 가는 길이야. 이제 일어났어요?
- 목소리가 왜 그래요? 나쁜 꿈을 꿨어요?
- 괜찮아요. 꿈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나아질 거예요.
- 응, 다시 전화할게요. 괜찮아요. 그러니 이제 뭐라도 마셔요.
어느 지역인지 모르겠지만 사투리를 쓰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침착하며 상냥하다. 너무 나긋나긋하여 옆에 있는 나마저 안심할 정도로.
나도 잠에서 깨면 울던 날이 있었다. 잠든 줄 모르고 까무룩 잠이 든 낮에는 특히 더 그랬다. 오래 울고, 오래 무서워했다. 내가 어느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던 날. 어스름이 질 무렵 불안한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등을 쓰다듬고 안아주었던 당신이 고마웠다.
나쁜 꿈을 꾸었다던 그 사람은 무사히 꿈에서 벗어났을까? 나도 나쁜 꿈을 꾸면 전화해야지. 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하면 침착하게 ‘꿈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세요.
3.
망원역에 도착해 2번 출구로 나갔다. 망원시장이 나왔다. 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특히 떡볶이와 만두는 단 한 곳도 똑같은 맛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시장에서 만둣집이나 분식집을 발견하면 눈여겨본다. 호기심을 이끄는 집과 상호가 독특한 집을 구경하다, 오늘 경로잔치를 하느라 오후까지 장사를 안 한다는 안내문을 붙인 국밥집이 보인다. 테라스에서 봉사 활동하시는 선생님들 표정이 밝아 보여 나도 덩달아 즐겁다.
오늘도 카카오맵에 의지해 망원동 골목 사이를 거닌다. 최단 거리로 안내해준다던 카카오맵은 자꾸 주택가 골목으로 보낸다. 오래된 주택가 골목을 들어섰다. 화실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살짝 두려워진 순간, 집 앞에 쪼그려 앉아 빨간 대야에 담긴 총각무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와 며느리로 추측되는 젊은 외국인 여성이 있다. 총각무를 다듬던 할머니가 갑자기 골목이 울리도록 소리친다.
- 영익아! 영익아!
영익이는 누굴까. 할머니의 외침에 영익이는 답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다시 소리 지른다.
- 여어어엉익아!
할머님의 간절한 외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골목에 있던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순간 건너편 빌라 입구에서 중년의 영익 씨가 웃으며 등장한다. 넉넉한 체격에 인상이 좋아 보이는 그녀와 할머니가 만나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서둘러 화실로 향한다. 첫 방문에 지각할 수는 없다.
4.
약속 시각이 15분 남았는데, 도착지를 2분 앞두고 카카오맵이 더 좁은 골목으로 안내하여 갸우뚱하며 걷는다.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나는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걸까?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니 8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낡은 곳을 수리해가며 시간을 버틴 집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 비슷비슷한 회색빛과 획일화된 모양의 아파트에선 볼 수 없는 각각의 이야기가 골목 속 집들에 묻어있다.
갈색 벽돌로 만든 벽에 알록달록한 화분이 여덟 개나 쪼로록 달려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해 꾸민 걸까. 집주인이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일까. 화분을 줄로 묶어 벽에 대롱대롱 매달아 장식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을 꾸며본 적이 없는 나는, 밖으로 난 벽을 꾸미는 사람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한 줌의 햇빛과 벽돌 담장에 매달린 식물의 초록 기운이 나를 들뜨게 했다. 오늘의 골목 탐험은 성공이다.
5.
마침내 큰길이 나왔다. 1층에 카센터가 있는 건물 3층에 화실이 있다. 미술사 선생님과는 코로나 시절 줌으로 수업하며 일 년 넘게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을 만났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화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까지 숨을 참으며 두근거리는 순간, 모니터를 통해 바라본 사람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을 때의 반가움이란! 기쁘게 인사를 하고 리본이 묶인 와인을 건넨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선생님 그림을 구경한다. 미술사 선생님은 파리에서 13년 생활을 마치고 이제 서울에 정착했다. 오래 사랑했던 곳을 떠난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져, 파리가 그립지 않은지 선생님께 물어본다.
선생님의 그림은 색이 고요한 느낌으로 파고들어있다. 각각의 인물들의 틈 사이로 스며든 오묘한 색의 조합에 감탄하다 하나의 그림에 시선이 머문다. 시든 장미. 왜 하필 시든 장미일까 했는데, 꽃이 시들 때야말로 단 하나도 겹치지 않는, 그 꽃의 아이덴티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답하는 선생님. 시드는 순간에 빛을 발하는 존재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워 나는 감동하고 만다. 사라지지 말길 바라는 순간 피어나는 꽃이라니.
요즘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내가 바랐던, 나의 모습일까.
6.
화실엔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화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넘치는 햇살이 포근하고 따뜻하다.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테이블엔 참치 샌드위치와 달걀 샌드위치가 각자의 접시 앞에 놓여있고, 가운데에 놓은 접시엔 청포도와 빨간 사과와 노란 귤이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고, 가을에 어울리는 마롱 파이와 에그 타르트가 있다. 각 잡고 앉아서 저녁까지 와인을 마셔도 좋을, 취향저격의 브런치!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는 신나게 먹는다.
사람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화실에 흐르는 'Cigarettes After Sex'의 노래에 잠깐 옛 기억에 빠진다. 언젠가 와인 모임에서도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노래가 나왔다. ‘Affection’을 들으며 서로를 안고 난 이후엔 담배보단 키스가 낫다는 대화가 오갔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보컬은 목소리가 몽환적이라, 이런 곡이라면 섹스 후에 서로 마주 보고 피는 담배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담배보다는 키스가 낫다.
나는 양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 눈, 코 그리고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길 바라면서, 입술에, 양손에 상대의 체온이 느껴지는, 서로 한 공간에 존재함을 확인하는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힘을 담아 입을 맞춘다.
단순한 쾌락이 아닌, 진심을 담은 교감이 줄 수 있는 몸의 기록.
7.
테이블 위에서 이야기꽃은 활짝 폈다. 미술과 음악, 삶의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다 최근 읽었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달과 6펜스’는 고갱을 모델로 한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달과 6펜스’를 읽은 사람들은 스트릭랜드의 최후가 모두 비참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좋았다. 자신의 욕망을 알고 그 욕망을 향해 세습과 인습을 피해 올곧게 걸어갈 수 있는 그의 집념이 나는 부러웠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이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그 중요함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노리지 말고, 현재 즐거운 일을 우선하자.
8.
오전에 만나 오후가 되었다. 오픈스튜디오의 마지막 날이라, 피곤이 쌓였을 선생님을 생각하여 이쯤에서 퇴장을 결정한다. 집까지 어떻게 갈까 하다가 걷기로 한다. 목적지는 망원역에서부터 공덕역까지.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가게가 보이면 들려서 뭐라도 먹어볼까 생각한다. (배가 불렀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모처럼 큰맘 먹고 멀리 나온 것이다.) 평소엔 동네 밖을 잘 벗어나지 않는 편이기에, 눈을 크게 뜨고 거리를 걷는다.
거리 곳곳에 크고 작은 추억이 걸려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기억도, 오래 사랑했던 사람과 홍대에서 데이트하던 날들도 거리에 함께 걸려있다. 많이 울었던 거리였는데,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이제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도시의 시간은 변화가 빠르다. 좋아하던 만화책 서점인 한양문고가 사라졌다. 요새 사람들은 만화책 사는 즐거움을 모르려나, 아쉬워하며 걷는데, 앗! '김진환 제과점'이 열려있다. 김진환 제과점은 1996년도부터 한 자리에서 식빵을 만들어 파는 제과점이다. 요즘이야 식빵 잘 만드는 집이 많지만, 2000년도에는 김진환 제과점의 우유 식빵은 귀했다. 적당히 바삭한 겉면과 촉촉함이 느껴지는 식빵의 속결!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질감만으로도 맛있는 식빵은 이곳이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데엔 추억의 맛도 섞여 있겠지만, 어쨌든 내게 우유 식빵의 참맛을 알려준 건 김진환 제과점이 처음이었다. 마포에 있는 엄마 집에 살 때는 종종 들려서 우유 식빵을 사곤 했는데, 엄마 집을 나오고 나서는 근처에 들릴 때마다 번번이 가게가 닫혀있어 빵을 살 수 없었다. 오늘은 제과점의 문이 열려있다. 기쁜 마음으로 안에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우유 식빵 두 개를 주문한다. 빵을 담아주시는 사모님 뒤편으로 김진환 선생님이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방을 청소하시는 중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선생님의 모습은 어쩐지 하나도 늙지 않은 듯하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넨다.
- 오랜만에 왔는데 여전히 빵을 만들고 계셔서, 기뻐요.
사모님이 봉투에 빵을 담아주시며 빙긋 웃는다. 주변이 시끄러워 안 들릴 거라 생각했는데, 주방에서 김진환 선생님이 묻는다.
- 얼마 만에 왔는데?
- 십 년이요.
- (씨익 웃으시며) 다음엔 십 년 만에 오지 말고. 또 와!!
우유 식빵을 받아 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 좋게 문을 열고 길을 나선다.
무심코 건넨 말이었지만,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기쁜 마음은, 아니 그냥 내 마음은, 당신이 알아주길 바라는 내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당신이 결코 알 수 없으니까.
9.
경의선 숲길엔 산책하는 강아지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강아지가 좋아지는 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모조리 드러내는 개의 표현 방식이 사랑스럽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면 좋으련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지….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한다. 엄마는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도, 편하게 전화를 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 나는 경의선 숲길을 따라 걷다, 엄마 집 근처에 가서야 전화를 한다. 엄마는 아직 회사에 있다고 한다. 잠깐 들리겠다고 하고, 엄마 집의 비밀번호를 묻는다.
엄마 집은 올 때마다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그럴까, 이 집에서 오래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나는 올 때마다 집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엄마의 집은 언제 방문해도 단정히 정리되어있다. 청소를 마음 잡고 해야 하는 게으른 나와는 다르다. 이 공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거실에 앉아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며 엄마의 손길이 담긴 흔적을 몸으로 느낀다.
김진환 제과점에서 산 우유 식빵 한 개를 주방에 두고 잠깐 숨을 돌리는데, 어라 이건 뭐지? 뚜껑을 열어보니 갓 담근 총각김치다. 아침에 영익 씨를 애타게 찾던 할머님이 손질하던 총각무를 보곤 맛있는 김치가 먹고 싶었는데! 냉큼 가위를 찾아 줄기 하나를 잘라서 맛본다. 아직 익지 않았음에도 알싸한 맛보다는 감칠맛이 돈다. 좋은 고춧가루와 액젓을 잘 쓴 김치의 맛에 몹시 반갑다.
김치를 사 먹는 나는, 최근 김치 쇼핑에 네 번이나 실패했다. 하나같이 소금에 절이기만 한 맹맹한 맛만 나서, 요새 사람들은 이런 김치를 먹고 사는 건가, 뭘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너무 기쁘다. 그냥 들고 갈까, 쪽지를 남길까, 다시 전화하면 엄마 일하는 데 방해될까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한다. 조금만 들고 가도 되겠냐고. 엄마는 안 그래도 그거 챙겨주려고 했는데, 일하느라 잊었다며 두 통 모두 가져가라고 한다. 나는 한 통만 가져가겠다고 답하고 잽싸게 전화를 끊는다.
오늘은 옳은 시간에 옳은 장소에 왔다. 엄마 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선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하루의 절반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