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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주영 Nov 24. 2022

소설(小雪) :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날

 ‘소설’, 24절기의 스무 번째 절기.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날’엔 낮과 밤처럼 다른 결의 사람들을 만났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비눗방울처럼 마음을 부풀게 만드는 사람을 안았고, 캄캄한 바다 위에서 저 멀리 보이는 등대의 불빛을 향해 느리지만 조금씩 자신의 방향을 찾아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가 세상을 밝게 비추는 동안, 시간을 쪼개 만난 사람들은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눈을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또렷하고 힘차며 온화하다.      


 구름이 끼어 흐릿한 오후에 몇몇 사람이 모여 널따란 원목 테이블 위에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펼쳤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를 자신이 죽고 난 뒤 25년이 흐른 뒤에 출간하길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과 달리 6년 뒤에 출간됐지만) 글 쓰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작가의 비극적이고 사적인 가정사가 담긴 희곡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유진 오닐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닐까?’, ‘사후 25년이라는 조건을 단 데에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작가인 그 역시도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가 몹시 힘들었을 것’이라 추측하며 이후 각자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가족의 정의 역시 모두 달랐고, 숨어있는 상처의 형태도 다양했지만, 이야기 속의 단어는 부드러웠고 연한 파스텔톤의 고운 색감이었다.      


 어스름이 질 무렵엔 1년 만에 좋은 소식이 생긴 이를 축하하기 위해 만났다. 큰 키에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굴곡 많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꿈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딛는 중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했으며 성실했고 또한 마음이 여렸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 짙은 화장 뒤에 여린 마음을 숨기는 것처럼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잘 웃었다. 그날도 그녀는 저녁 식사 내내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가 식탁에 올려놓는 이야기는 선연한 피가 흐르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이야기 속엔 가족이라는 이름의 끊을 수 없는 연을 바탕으로 사랑을 갈망하는 이와 그 간절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불균형한 삶의 굴레에서 상처받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지만, 상처를 헤집는 사람과 무신경하고 무책임한 사람 그리고 오랜 시간 채워지지 않은 사랑을 채우기 위해 ‘조금만 더’를 되뇌며 자신을 억압했던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자신을 억압했던 사람은 그 자신이 폭발하여 소멸하기 전에 병원을 찾아가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오래 헤맸지만,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그녀에게 날개는 달아주지 못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발목을 부여잡는 사람이 없길, 그녀가 그 족쇄를 끊어내길 바랐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살을 도려낸 지 오래되어 선지처럼 굳어버린 이야기를 듣는 것과 약간의 응원, 온기가 담긴 몇 가지 음식 내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긴 시간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던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엔 웅덩이처럼 짙은 감색의 축축함이 남았다.      


 집을 정리하고 고요함이 내리깔린 밤엔 어둠이 몹시 무거웠고, 침대에 눕자 바닥에서부터 등을 끌어당기는 듯한 피곤함이 나를 덮쳤다.      


 뒤죽박죽 엉킨 밤을 지나, 해가 떴다. 나는 눈을 뜨고도 침대 속 이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정을 비운 날이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연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출을 준비하며 동선을 체크했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게으른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틀어졌으니 나가서 뭐라도 하고 들어와야 했다.      


 집을 나서자, 바깥 외출을 왜 거부했을까 후회할 만큼 볼을 스치는 바람이 선선하고 경쾌했다. 살아 숨 쉬는 것에 대한 안도감,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바람의 간지러움을 느끼며 좋아하는 식당에 간다. 모든 직원이 상냥하고 음식에 대한 인심이 후한, 작은 텐동집이다. 하이볼을 진하게 한 잔 주문하고, 메모장에 볼펜으로 글을 끄적이며 음식을 기다린다. 차가워진 바람 때문일까. 미소장국이 어묵국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이런 사소한 변화가 반갑다. 오징어 튀김이며 돼지고기 튀김, 치즈 카츠 등 후하게 나오는 서비스 음식과 헛기침에 하이볼이 너무 진하냐며 걱정해주는 말 한마디, 음식을 건네며 눈을 맞추며 보이는 웃음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만 원짜리 텐동 한 그릇에 아이스크림까지 살뜰하게 챙겨주어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선다. 한 번 움직이고 나니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밟혀 결국은 이런저런 잡일을 기계처럼 처리한다.      


 느지막이 출근한 남편은 늦은 밤에 돌아왔다. 야식을 즐기는 아내의 새로운 간식을 들고서. 그리고 그가 내민 책 한 권.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화책이란다. (동화책까지 쓰다니, 게이고는 정말이지 글 쓰는 기계다.)     

 남편과는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시간을 함께했다. 어젯밤 집에서 손님맞이를 함께 한 남편은 내가 생각이 많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읽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자판기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발견하고 빌려왔다고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위해 그의 책을 빌려왔다는 사실이 고맙다. (추리소설이 아닌 동화책이지만, 어쨌든 히가시노 게이고니까) 무엇인가를 보면 나를 떠올리고,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아는 사람과의 동거가 새삼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화책 『마더 크리스마스』는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그는 추리소설이 더 잘 어울린다) 젠더의 틀을 깨는 어린이 책은 환영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차별이 아닌 연대와 사랑이니까.      


 나는 요새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름에 쓴 글이 담긴 책을 선물한다. 사인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짧은 글귀를 매번 다르게 써서 선물하는데, 그날 쓴 글은 그랬다.     


‘여름의 잔열을 안고, 따뜻한 겨울이 되길 바라며.

2022년 11월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날, 전주영 드림.’          


 모쪼록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가 아름답길 바라면서…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말 그렇다. 아름답길 바란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하면 아름다워질까. 이번 겨울엔 그걸 고민해봐야겠다. 얼음이 얼기 시작해도, 새순이 싹트는 싱그러운 봄은 다시 돌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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