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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Aug 05. 2021

"현진이에게"-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 1

색연필 그림일기


현진아,

해가 진 후 8000보를 걷고 왔어. 이곳 횡성은 강 주변 산책길이 좋더구나. 수업이 끝나고 강 주위를 걷는 일이 하루 중 제일 편한 시간이다. 땀 흘린 후 샤워를 하고 나니 더 바랄 게 없다.


밤이면 집 생각이 나. 저녁은 잘 먹었나, 현진이는 뭐 하나, 집으로 마음이 간다. 네 인생에서 마지막일 여름방학을 엄마 대신 살림을 하며 갑갑한 방학생활을 하는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이고 어쩔 수 없는 이 시국이 안타깝기만 . 하지만 너의 시간도 엄마의 이런 시간도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이니 잘 보냈으면 좋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멋진 풍경을 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는 것처럼 좋은 책을 읽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면 난 너희들이 생각나. 어제도 잠이 오지 않아 영화를 보았는데 보고 나니 오랜만에 네게 편지가 쓰고 싶어 졌어. 조금 길어도 읽어 주겠니?


"리스본행 야간열차". 뭔가 제목이 낭만적이지?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들었어.

혹, 네가 본 영화는 아닌지 모르겠다.


영화 포스터-리스본에 도착한 라이문트 (제레미 아이언스 팬들께 죄송하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라티어)을 가르치며 재미없고 고독하게 살고 있는 라이문트 그레고리오(제레미 아이언스 역).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비 내리는 출근길. 그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빨간 코트의 여자를 구하고 그녀와 함께 학교에 간다. 그가 수업하는 사이 코트를 남겨 둔 채 여자가 사라지고 라이문트는 그녀의 코트를 들고 황급히 뒤를 쫓아가지만 행방이 묘연해. 당황한 라이문트는 그녀의 코트에서 <언어의 연금술사>란 책과 기차표 한 장을 발견하는데 기차표는 15분 후에 출발하는 리스본행이다. 그는 급하게 역으로 가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열차 시간이 다가오자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열차에 오른다.


정신 차려 보니 포르투갈이야. 너라면 어떨 것 같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겠지. 학교는? 수업은? 여기서 뭘 해야 하지? 열차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낯선 곳에 도착한 라이문트는 그녀의 코트에 있던 <언어의 연금술사>를 읽는 동안 책에 매료되고 저자인 아마데우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책의 문장들이 화면에 흐르는데 그 내용이 마음 건드려. 예를 들면 이런 거.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 중 아주 작은 일부만 경험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 "

  "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 연민, 매력이 가득 찬 감독  "


이 영화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야. 라이문트의 이야기가 외화(겉 이야기)라면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두의 이야기는 내화(속 이야기)라 할 수 있지. <언어의 연금술사> 아마데우와 그의 친구들은 영화의 스토리를 끌어가면서 내화의 중심이 된다. 처음엔 라이문트가 빨간 코트의 여자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책을 보고 매료된 라이문트는 작가의 뜨거운 삶의 열정을 느끼는데 그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이기도 했어. 왜 우리는 불확실하면서 뜨거운 무언가에 끌리는 걸까? 우리의 인생이 불확실하기 때문일까? 얼떨결에 시작된 일탈은 아마데우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목적이 생기고 영화는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는 라이문트의 이야기와 그가 밝혀내는 아마데우의 인생을 교차로 보여주며 전개돼.


아마데우의 집을 찾아가던 라이문트는 사고로 안경이 망가지고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간 곳에서 안과 의사 마리아나를 만나는데 그녀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그는 마리아나에게 자신이 왜 포르투갈에 왔는지 설명하고 아마데우를 잘 알고 있던 마리아나는 아마데우의 동지였던 삼촌 주앙을 소개한다. 주앙은 아마데우와 조지, 스테파니아의 친구이자 동지였고 비밀경찰 멘데즈의 고문으로 피아노를 치는 손이 망가진 채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어. 라이문트는 마리아나의 도움으로 주앙, 조지, 스테파니아를 차례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데우와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데우가 살던 70년대의 포르투갈은 40년간 지속되던 *폭압적 독재 치하에 놓여 있었어.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죽을 위기에 처한 '리스본의 도살자'(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광주가 생각났다)를 의사의 양심으로 구하는데 그는 독재에 저항하는 혁명세력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던 비밀경찰의 우두머리, 멘데즈였어. 아마데우는 그를 살린 대가로 배신자가 되어 동지들과 민중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또한 그의 절친이자 동지였던, 조지의 여자 스테파니아를 만나면서 운명적으로 그녀와 사랑에 빠져. 멘데즈를 살린 것이나 스테파니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마데우에겐 신념이자 운명이었어. 내가 그 상황에 놓였다면 멘데즈를 죽게 두었을까.  아름다운 스테파니아의 눈빛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인생에서 장담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같아.


주앙이 잡히고 멘데즈의 추격으로 저항조직이 탄로 나면서 아마데우의 동지들이 비밀경찰에 잡히거나 고문을 당한다. 네 잘난 신념 때문에 동지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멘데즈를 죽여야 했다고 비난받는 아마데우.  그는 묵묵히 비난을 견딘다. 그리고 조직의 중요한 운동원과 저항 활동에 관련된 비밀들을 모두 암기하고 있던 스테파니아가 경찰에 쫓겨. 친구 조지도 연인과 친구의 배신에 이성을 잃고 조직의 비밀을 모두 암기하고 있는 스테파니아를 죽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총을 들고 둘을 쫓아가지만 결국 돌아서고 아마데우는 목숨을 걸고 경찰에게 쫓기는 스테파니아의 탈출을 돕는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아마존으로 떠나자고 하지만 스테파니아는 아마데우와의 미래를 거절하고 아마데우가 살린 멘데즈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해 친구들이 있는 스페인으로 간다.


그 후 저항조직은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주앙처럼 고문을 받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 아마데우는 스테파니아를 떠나보낸 후 고독하게 남아 글을 쓰다가  *혁명이 일어나는 해에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오빠 아마데우를 사랑했던 동생이 그의 유고를 모아 100부를 발행하고 그중의 한 권이 라이문트에게 닿아 운명이 된 거야. 


영화는 종종 아마데우의 글을 읽는 라이문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책의 내용을 아마데우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데 문장들이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우린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공간을 떠날 뿐이지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아마데우의 흔적을 밟는 라이문트에게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는 전화가 간간이 걸려 온다. 나는 아마데우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책의 내용과 베른의 학교에서 걸려오는 전화 두 가지가 중요하게 느껴졌어. 하나는 라이문트의 일탈을 이끌고 또 하나는 그 일탈을 끝내고 돌아오라는 장치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야.


삶에는 이 두 가지가 늘 평행선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아마데우의 음성으로 전해지는 책의 내용이 라이문트의 영혼을 흔들고 그것에 이끌리는 라이문트는 언제 돌아올 거냐는 전화에 대답을 하지 않아. 아니 못하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라이문트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에서 막 빠져나와 낯설고 두렵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삶의 열정을 쫓는 중이었니까. 돌아간다, 안 간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 라이문트. 이쯤 되면 관객은 자신의 바람을 투영해 라이문트가 돌아가지 않길 바란다. (  벌써 라이문트에게 감정이 이입된 나처럼) 작은 손가방 하나 없이 떠나 온 라이문트는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까? 라이문트는 아마데우를 통해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마리아나와 저녁을 먹으며 라이문트가 묻는다.

"내가 재미없고 지루해서 아내도 떠났어요. 당신도 내가 재미없죠?"

마리아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당신은 지루하지 않아요."라고 말해.

말없이 마리아나를 쳐다보는 라이문트.


영화는 리스본의 현재로 돌아온다. 아마데우는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음이 드러나.

 

친구 조지의 질투는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갔으나 그는 아마데우도 연인인  스테파니아도 죽이지 못한다. 둘 다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마데우가 약학 대학 졸업 선물로 자신에게 준 약국을 현재까지 떠나지 않고 운영하며 아마데우를 기리는 의미로 밤이 되어도 약국의 불을 끄지 않는다. 아마데우가 생의 끝날까지 의사로서의 신념을 지키며 살았던 것처럼 조지도 그런 뜻을 이어 가는 거지. 오빠 아마데우를 사랑했던 동생 아드리아나는 그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의 유고를 모아 책을 만들었고 주앙은 손이 망가질지언정 밀고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스테파니아는 역사 선생으로 스페인 살라망카에서 살고 있었어.


라이문트는 마지막으로 스테파니아를 찾아가는데 나는 어떤 여자일까, 궁금했어. 

나이가 들었어도 아름답고 지적인 스테파니아.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라이문트에게 '그가 알고 싶은 게 나였을까요? 인생이었을까요?' 하고 물어. 라이문트는 아마데우가 조지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심장병으로 사망했음을 알려 . 회한에 잠기는 스테파니아.


아마데우와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그녀를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아마데우는 모든 것을 버리려 했지만 스테파니아는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현실을 선택했어. 여자든 남자든 사랑 앞에서 현실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아.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와의 사랑을 택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아야 할까? 현실적인 생존의 선택을 한 스테파니아가 이기적이었던 것일까. 내가 아는 너는 단연 "노!"라고 대답할 거야. 맞지? 사랑을 택하는 것도 현실을 택하는 것도 각자의 가치관이며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하겠지? 그래. 동감이야.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는 가지 않은 쪽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


이제 라이문트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현진이에게"- 2를 기대해 줘. ^^


 (*포르투갈은 1974년 약 40년간 포르투갈을 지배하던 독재 정치가 청년 장교들의 혁명으로 끝이 난다.  이 혁명을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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