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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Aug 08. 2021

"현진이에게" 2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

색연필 그림일기


편지 1은 잘 받았니? 네 형이 문자를 보냈더구나.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라이문트의 남은 이야기를 해야겠지.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영화 속 아마데우의 묘비명이야. 참 묵직한 대구의 문장이구나. 아마데우와 그의 친구들은 독재 치하에서 많은 걸 잃었다. 가족과 적이 되고 목숨을 잃고 사랑과 친구를 잃었으며 피아노를 좋아하던 손을 잃었지. 신념을 지킨 일은 배신이 되었고 꽃 피워야 했을 인생과 청춘, 꿈을 뺏겼다. 그러나 아마데우는 역사 앞에서 비겁하지 않았고 인생을 깊이 사색하며 옳다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어.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니 아마데우 같은 선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선택은 다른 것을 잃는 일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고 깃털처럼 자유로웠으며 불확실함에 버거워했던 그때."


네가 바로 "그때"에 있구나. 이제 너는 곧 졸업을 할 것이고 사회로 나가야 한다. 너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 있고 너의 영혼은 깃털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불확실함에 버거워하는' 청춘이지. 사회는 네가 경험하지 못한 묵직한 그 무엇으로 새롭게 다가올 거야. '깃털처럼 가벼운' 네 영혼을 무겁게 짓누를  수도 있겠지. 네가 아무리 초긍정의 사람이라도 현실은 너를 위협할 것이다.


그 무엇이 되라고 너를 밀어버리고 싶진 않다. 내가 너를 밀지 않아도 너의 삶이 너를 밀고 있을 테니까. 다행히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너에게 재능도 주어졌으니 감사하다. 너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네 앞에 놓여 있고 너는 깃털처럼 자유로우며 네 앞엔 불확실함이 가득'하지만 이 '불확실함'이야말로 네게는 '무한한 가능성'이야. 네가 원하는 것과 세상의 기준 사이에서 너는 수많은 시소를 타야 하겠지만 그 묘미 또한 너는 배우게 되겠지. 늘 깊이 있는 것을 추구하고 삶이 주는 열정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어떤 것이 널 흔들고 있을까? 내면은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태도로 드러난다. 매일 선택하는 작은 것들이 우리 인생을 만들고 있어! 아버지 닮아 말수가 적은 우리 아들. 너무 과묵하게 지내지 말거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 과묵함은 돌아봐야 해.


그 다리 위의 여인은 누구냐고? 그녀는 라이문트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가 있는 호텔로 찾아와서 자신은 바로 멘데즈, 즉 아마데우가 살린 리스본 도살자의 손녀라고 말한다. 라이문트는 놀라며 그녀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독재의 앞잡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은 어쩔 것이냐고 괴로워한다. 다리 위에서 죽으려 했던 그녀의 서사가 이해되는 지점이었어. 그녀에게 잘못은 없지만 그녀 할아버지의 죄악으로부터 그녀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역사와 삶이 그녀에게 주는 인과가 아닐까.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녀의 죄책감은 역사와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


햇살이 환한 기차역. 마지막 장면. (이 둘은 그림보다 훨씬 미남, 미녀다.)

라이문트는 마리아나에게 묻는다.

  " 내 인생은 어디 있죠? 여기 머문 시간 외에는...."

말을 잇지 못하는 라이문트. 아마도 그는 돌아가려는 순간에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거 같아.

  " 그런데 다시 돌아가는군요."

  " 뭐라구요?"

  " 왜 여기에 남지 않는 거죠? "

   "..............."

   " 여기에 남아요!"

우물거리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밝아지며 마리아나를 쳐다본다. 질문을 받고 미소를 띠는 라이문트의 얼굴을 비추며 엔딩.


그는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의 교장에게 자신의 책을 잘 맡아달라는 전화를 한 그였는데. 그가 다시 돌아간다면 그는 또 진지하지만 인기 없는 라틴어 수업을 하면서 지루하게 살아갈까? 그가 돌아가지 않고 포르투갈에 남았다면 마리아나와 함께 새 인생의 기쁨을 만끽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라이문트에게 "가지 마"라고 했어. 마리아나가 "여기에 남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래, 남아요! 라이문트, 열정을 되찾고 지루하지 않은 삶을 살아요! "라고 중얼거렸다. 숨겨진 내 마음이 허구적 상상 안에 있었나 봐.


"우리는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곳에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다. 어떤 곳을 갈 때 자신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간다. 그 여정이 얼마나 짧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데우의 문장에 답이 있는 것 같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분명한 것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가 특별한 삶의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건 조금의 답이라도 얻고 싶어서일 거야. 치열하고 진지했으며 신념 앞에 굽히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아마데우의 삶을 알아버렸기에 그가 어디에 있든지 새로운 삶을 살지 않을까? 지루했던 라틴어 수업에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체스를 홀로 두며 견디던 그의 삶에도 변화가 생길 거라고. 변화를 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변화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니까. 그래서 유치한 일탈이 아니라 진지하게 브레이크를 거는 일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일탈이 필요해졌을 때 용기를 발휘하기를 응원할게.


현진아,  

오랜만에 느낌 있는 영화를 보니 감흥이 일어 너와 얘기하고 싶었어. 너희 형제가 군에 있을 때 생각이 난다. 그땐 자주 편지를 보냈지. 시간이 또 이렇게 많이 지났구나. 네 형이 결혼해 독립하면서 나는 너의 독립도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늘 뜻대로 되지 않아. 편지 쓸 네가 있어 참 좋다.

열어 놓은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더위가 한풀 가라앉았어. 이제 자야지.

우리 내일 보자. 사랑해!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영화 포스터와 마지막 장면



*글에 인용된 아마데우의 문장들은 영화를 본 후 화면을 보고 메모했다가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조, 확인한 후 글에 실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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