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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l 25. 2021

성당 앞 노을

색연필 그림일기


횡성과 양평집을 오가는 동안 그림일기를 쓰지 못했다. 귀가하는 목요일부터 주말 동안 나는 방전된 배터리 같다. 글은 잠과 함께 밀려왔다가 까무룩 잠과 함께 잠들었다. 무심한 일상은 표정 없이 나를 앞질러 뛰어간다. 뭐 그렇게까지 부지런하고 성실한 지.... 밀린 잠을 자고 일어나 정신을 차리요일 저녁. 집안이 비어있다. 다들 어디로 갔나.


현관을 나서니 훅 하고 무더운 공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남편이 별채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나 보다. 더위 때문에 음악 소리도 덥게 흘러나왔다. 앞산에 긴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곧 어두워질 것이다.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걷기로 했다. 묵주를 꺼내 손에 들었다.


손에 잡은 묵주의 성모송 사이사이에 성모송보다 긴 *분심(잡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묵주를 잡은 손 끝에 땀이 차 기도와 분심도 끈적거렸다. 묵주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분심 사이에 성모송을 암송하는 것 같았다. 또 비우지 못하고 쟁여두고 있었구나. 집안 정리는 달마다 계절마다 잘하면서 어찌 마음은 비울 줄 모를까. 아니 도대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뭐란 말인가(기도하다가 욕은 하지 말자 ㅠㅠ ).


기도 중에 떠오르는 분심은 지금 내 마음의 현주소다. 이것을 섣불리 다루면 불란이 생긴다. 전쟁을 피하려면, 곧 사라지는 것인지 앙금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것인지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한다. 분심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쓰레기와 같다고 성당의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지.,.. 내버려 두기로 다. 곧 흘러갈 것이니 마음 쓰지 말자고 마음을 썼다.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감정을 붙잡고 그 감정을 더 키우는 것은 어리석다.


분심과 성모송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더위를 잊었다(분심의 순기능인가?). 묵주기도는 진작에 끝났는지 손은 묵주 끝에 달린 십자고상을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성당이 보였다. 벌써? 집에서 성당까지 걸음으로는 약 6700보 4.8km, 1시간 15분이 걸린다. 최근 수도권이 4단계에 진입하자 교구는 미사를 중지했고 2주간 나는 미사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성당이 반가웠다.

그리고

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성당 앞 노을

비를 잔뜩 머금은 먹장구름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성당 십자가 위로 회색에 가까운 하늘과 핑크빛 노을이 조금씩 섞이다가 먼 하늘로 갈수록 선명하게 파란 하늘과 황홀한 노을이 펼쳐졌다. 저 노을은 수채물감의 오페라야. ~하고 바라보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찍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몸은 길 위에 있는데 머릿속으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옆 냇가에 서서 떠오르는 것을 녹음했다. 돌아와 색연필을 고르고 노을을 그리는 사이 그 많던 분심이 사라졌! 노을을 그리니 글은 활자가 되어 나타났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림 그리는 게 어렵냐, 글 쓰는 게 어렵냐. 그림이 더 좋은가. 글 쓰는 일이 더 좋은가. 당시 내 대답은 '모르겠는데'였다. 이건 마치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림일기를 시작할 땐 글을 먼저 쓴 후 글에 맞는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은 반대다. 그림이 없으면 글 쓰기가 어렵다. 한동안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그리 잘 그리는지 세상의 비웃음을 살까 고민했다. 그런 내게 그림이 전공인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그림은 어머니만의 것이에요. 아무도 그 세계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아요."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아들이 거절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을 배우면 어머니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많이 그리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오히려 지름길이라고도 했다. 아들의 말이 옳을까?


어느 것이 어렵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림을 통해 글이 나오고 글이 그림을 이끌어낼 때도 있다. 둘 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도 의미가 없다. 그림 없이 글을 쓰거나 글 없이 그림만 그린다는 것은 내겐 둘 다 미완성의 의미다. 노을을 그리지 않았다면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며 그림이 글로 이어져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 작은 그림 한 장과 길지 않은 글이 주는 의미와 가치의 경중을 따지는 것 또한 내겐 경망스러운 일이다. 어떤 일이 주는 단순한 위로와 기쁨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어 즐거울 뿐, 그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아닌지 말하는 것은 수다스러운 일일  뿐이다.


나의 일상은 그지 같고 지루하고 우습고 닥치고 참아야 하며

왈가왈부 시끄럽고 변덕스럽고 무시할 수 없으며 지긋지긋하지만

그림일기로 나는 행복하다. 


 "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상태 중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상태다. 행복이란 내 안에 무언가가 있는 상태다.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는 관심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 ( [굿 라이프] 중에서 인용, 최인철, 21세기 북스 출판 )


*분심: 마음이 어지럽고 흐트러지다.

(천주교에선 기도 중에 일어나는 온갖 잡념을 분심이라고 말한다. 소화 데레사 성녀께선 분심을 일컬어 '야생마가 마룻바닥을 뛰어다닌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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