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한편에 심은 나무 끝에 검은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다. 작년 가을부터 매달려 있던 비닐봉지다. 어제는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날아갔으려니 했는데 출근하며 보니 여전히 가볍게 까불리며 붙어있다. 다가가 비닐봉지를 올려다보니 손에 닿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흔들리는 비닐봉지를 보니 뜬금없이 몇 년 전 세간의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서 인물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이 무슨 의식의 흐름일까. 가령 이런 것이다.
*" 귀하는 헛된 희망을 파는 거요? 것도 비싸게."
" 헛될수록 비싸고 달콤하죠. 그 찰나의 희망에 돈을 많이 쓴답니다. 나라를 팔아 부자가 되겠다는 불순한 희망, 애를 쓰면 나라가 안 팔릴 거라는 안쓰런 희망, 정혼을 깰 수 있겠단 나약한 희망, 그런 헛된 것들요."
*" 저마다 제가 사는 세상이 있는 법이오. 제각기 소중한 것도 다 다를 것이고. 빈관 사장 당신이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 세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소. 허니 내 앞에서 그리 위악 떨지 마시오."
나뭇가지에 매달린 비닐봉지저 비닐봉지는 왜 내 마음에 들어 온 것일까. 어느 날은 비닐봉지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열기도 했다. 마음에 품은 소망을 나뭇가지에 매달린 비닐봉지 같다고 여겼나 보다. 스스로 그것을 헛되다고 여긴 탓일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비닐봉지. 약한 바람에도 가볍게 까불리는 비닐봉지는 내 마음속 헛된 희망처럼 보인다. 겨우내 바람과 눈비 속에도 매달려 있는 비닐봉지가 '나약하고 헛된 희망'같다는 엉뚱하고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건대 내가 품은 소망은 헛된 희망들이다. 멋진 글 한 줄 쓸 거라는 희망, 주변인 모두가 내 편일 거라는 희망, 건강을 돌보지 않아도 건강할 거라는 희망, 내가 죽어도 부모님은 살아계실 거란 희망, 내 아이들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행복할 거라는 희망, 못난 내 형제가 하루 아침에 근사한 인간으로 변화되길 바라는 그런 헛된 희망들이 나의 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린다.
아니 사실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길 바라는 희망, 바이러스의 두려움 없이 투표에 대한 고민 없이 산중에서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희망,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무위도식하고 싶다는 내 진짜 헛된 희망.
'불순한 것이든 안쓰런' 것이든 간에 희망은 늘 불순한 것과 안쓰러움 사이에 있는 '어떤' 것 아니던가. 헛될수록 더 매력적인 것이니.
저마다 '제가 사는 세상이 있어 제각기 소중한 것도 다 다를 것'이므로 나는 내 소망이 불순하든 안쓰럽든 혹은 헛된 것이든 간에 최선을 다해 헛된 희망들을 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렬하게 무위도식하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이다. 무위도식하며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바라고 있다고오늘도 일기에 적는 것이다. 일기를 쓰며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가볍게 까불리는 검은 비닐봉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날아가버릴 비닐봉지를 떠올리며 오늘도 내 세상에 매달려 있으나 헛된 희망을 품은 나도 헛된 희망 속으로 가볍게 날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여, 내 앞에서 위악 떨지 말기를.
그저
다만
저 비닐봉지처럼.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