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수 있습니다."라는 메일이 간혹 왔지만 "작가님 글이 보고 싶습니다. 무려 60일 동안 못 보았네요"라는 알림은 처음이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주변을 정리 정돈하는 습관이 있다. 액자가 비뚤어져 있다거나 먼지가 보인다거나 머리카락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집중을 하기 힘들다. 미루어둔 자잘한 일들까지 처리해야 노트북을 켤 수 있다. 그래서 작업 전엔 주변 정리와 청소를 하곤 한다. 이런 내게 최근 힘든 일이 있었고 아직도 그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브런치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
나는 또 관계에서 실패했다.
생전 처음 공황장애 같은 걸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는 화병이라고도 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고 느꼈는데 숨은 쉬어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귓가에 아픈 말들이 쟁쟁거린다. 후회와 미움이 촘촘히 벽이 되어 쌓이고 비슷한 사람을 보면 심장이 소리 없이 빠르게 뛴다.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잠을 자면 가슴 답답한 장면이 반복해서 재현되고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깨곤 한다.
가능한 외출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다. 사람들을 만나 나눈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를 곱씹다 보면 과부하가 걸린다. 나의 감정과 생각, 의도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일에 극도로 피곤함을 느낀다. 나는 안다. 사람들 얼굴의 미소 뒤엔 언제든 다른 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야수의 발톱이 있다는 것을. 그 발톱에 맞서기 위해 나는 더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관계에서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을까. 화해를 한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발톱의 상처가 나아도 그 상처는 선명하게 남아 자신의 발톱을 더 길고 날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두운 공원의 흐릿한 가로등
그러는 와중에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수 있습니다."라는 메일이 잊을만하면 온다. 브런치의 이 같은 메일은 괴롭다. 뭘 쓰라는 거야. 내겐 쓸만한 이야기가 없어. 브런치를 삭제하라는 문자를 받은 날 나는 천둥처럼 분명히 알았다. 내 글이 누군가에겐 위선적으로 읽혔다는 것을 말이다. 촉수를 건드려 작게 오므라든 말미잘처럼 나는 잔뜩 웅크러졌다. 그러니 뭘 써야 할까. 습관적으로 글쓰기를 열어놓고 쓰다가도 오므라진 촉수는 다시 일어서지 못해 활자를 지우고 만다. 내 글쓰기가 '퉁퉁거리고 투덜거리는' 비겁함이 될까 봐 자꾸 뒷걸음을 친다. 이 비겁함은 지난 3년간의 내 진심과 애정을 물거품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쉬운 관계와 어려운 관계가 따로 있을까. 부모 자식 간이면 좀 쉬울까. 형제간은 편하고, 부부 사이는 어려운 걸까. 조직 내 관계는 어렵고 가족은 쉬울까. 믿었던 사이라면? 내가 그에게 잘해 주었으니 그도 내게 잘해 줄 것이라는 거? 아니 내게도 그에게도 발톱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는 것을 또 간과했을 뿐이다. 어떤 관계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해야 하는 빈도가 늘어난다면 그 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끝낼 용기가 없어 지속된 관계는 자꾸 일그러지면서 불협화음을 띠고 무례해지면서 발톱과 함께 흉한 민낯을 드러내는 끝맺음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허구가 아니어서 결말로 인한 갈등 해소는 없다. 소설 속 허구와 달리 결말은 났으나 갈등 해소는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암막 커튼이 쳐진 마음은 앞산에 꽃이 피어도 이쁜 걸 몰랐다. 그런데 자꾸 브런치 알림이 뜨고 날이 너무 좋아 내 시커먼 내장까지 햇살이 비친 날, 라일락이 피고 글이 쓰고 싶어졌다. 언제든 들어줄 테니 하고 싶을 때까지 얘기하라고 했던 며칠 전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이곳은 내 브런치고 이런 이야기도 나의 일부가 아닌가. 꽃 피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도 글쓰기가 아니던가. 게다가 브런치 메일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잖아.
"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 맞아요. 글을 쓰겠습니다. 브런치를 발행하든 삭제를 하든 내 맘이 아닌가. 이곳은 내게 허락된 나의 영토이고 내 영혼이 늘 안녕해서 글을 썼던 것은 아니니까. 벌어진 현재를 잣대로 진솔했던 나의 지난 기록에 대해 칼을 대는 것은 옳지 않다. 나 역시 그로 인해 부끄러워하며 내 흔적을 의심했던 것 또한 옳지 않다. 당시의 내 감정과 생각을 브런치에 담을 때 그것에 거짓이나 억지 표현은 없었으니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래, 안녕하기 위해 애쓰며 견뎠고 지금은 좀 아프다고 써야겠다. 나의 치명적인 발톱이 이 브런치에서 다른 발톱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써야겠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토하겠지만 누군가는 내 글을 그저 읽어줄 수도 있을 테니 토하든 욕을 하든 좋아요를 누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걸 넘어서야 꾸준함을 가질 테고 그 꾸준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발톱으로 새로 날 수 있을 테니까.
하여 세상은 나의 실패에 관심이 없지만 정리를 해야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나는 빌려온 다음 문장으로 나의 실패를 정리하고 날아온 메일에 답을 하련다.
*"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