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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되게 해 주세요"

색연필 그림일기 2

by Eli

지나간 흔적은 사람이 살았다는 과거 때문에 끌리고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쓸쓸하다.


오래된 사원과 절터, 박물관의 이끼 낀 물건들이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삶으로 꽉 차 있던 곳이 지금은 관광객의 시선 안에만 있기에 허전하고 쓸쓸하다. 아니면 보는 이의 내면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피아골.

산은 높고 대견하며 골은 깊고 깊어 무서운 이야기가 많다. 자연은 그 안에 사람이 들거나 안 들거나 상관없이 스스로 채우고 스스로 비워내 늘 충만하다.


아침 일찍부터 산새들 매우 명랑했다. 주저 없이 일어나 낯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밥 먹을 곳을 기웃거려본다. 대부분 식당이 문을 닫았다. 꽃 시즌이 끝났고 부처님마저 이미 오셨으니 꽃도 부처님도 지나간 유행이 되어 꽃길과 그 길의 절집들이 적막하다. 나는 이 적막을 사랑해서 꽃 시즌이 끝나길 기다렸다.


꽃이 진 자리마다 빨긋한 열매들이 달려있다. 꽃이 져야 나무는 그늘을 만드는구나. 문 닫은 식당을 뒤로하고 서늘하고 청량한 공기를 욕심껏 들이마신다. 아주 오래간만에 숨을 쉬는 기분이다. 후~후~ 볼에 바람을 넣었다 불었다 해 본다.


차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민박집 근처 절집으로 산책 갔다. 대웅보전 앞마당 단풍나무에 소원들이 달려있다.


"경찰시험에 붙게 해 주세요 - 아무개

좋은 동네로 이사 가게 해 주세요 - 아무개 엄마

내가 하는 것마다 잘되게 해 주세요 -2000년생 아무개"


구례 연주사에 달린 소원들

2000년생 아무개가 쓴 소원이 눈에 띈다.

"내가 하는 것마다 잘되게 해 주세요."

이 포괄적이고 불투명하며 소원다운 소원이 또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2000년생 아무개 소원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니 남편이 웃는다.


'부처님, 저두요.'

남의 소원에 숟가락 얻으며 나의 기원도 하늘에 달아본다.

'저 소원들, 기원들 다 이루어 주소서.

1000년 사찰 공력의 부처님, 굽어 살피소서. '


부처님 집에서 부처님께 인사하고 내가 믿는 하느님께도 빌며 돌아선다.

여행지의 시간은 현실이 아니어서 매일 뜨는 해도 매일 지는 노을도 특별하다. 해 저무는 남의 동네 낯선 어둠을 바라보며 익숙한 일상을 잊고 내 안의 어둠도 잊는다. 그래도 되는 거, 그게 여행 아닌가.


짧은 여행은 빠르게 흐르고 해는 짧아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인생은 찬란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 하늘에 동시에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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