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다니는 길에 나섰는데 전에 없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나는 현수막을 보는 순간 한동안 멈춰 서 버렸다.
"이런 것을 내 걸다니....아, 이 저속한 사람들..."
나도 모르게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배낭을 멘 사람이 지나가며 한 마디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이 마을 격을 알겠네."
이 현수막을 내건 주체는 화가 매우 몹시 났나 보다. 오죽하면 저런 말로 격한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내걸었을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동네 사람들끼리 갈등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이곳 둘레길 이용자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가볍자고 나선 길에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현수막은 안타깝게도 실화다
유독 '개년의 새끼'라는 욕설에 눈이 간다. '개년의 새끼'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그래서 찾아봤다. '개년'은 발정 난 암캐를 의미하는 비속어다. '개 같은 년'을 줄여 '개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녀, 음란한 여자를 뜻한다. 즉 아주 나쁜 뜻을 지닌 비속어 되겠다. 그런 여자의 '새끼'라... 저속하고 불쾌한 말이다.
이런 단어가 쓰인 현수막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공적인 마을 이름으로 내 걸었다?! 욕설을 내건 주체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위한 의도였을까?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아무 상관없는 나는 그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매우 부끄러웠다.
현수막을 걸자고 한 배경엔 분명 문제가 있었겠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뜻을 모았을테고 강한 경고를 전달하고자 저 현수막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수막이 걸리는 순간 oo 2리 마을의 주민들 자신이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겐 물론이고 그들 스스로에게도 욕설을하게 된다는 사실을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 안에 불특정 다수는 물론 스스로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내걸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주민들은 이러한 갈등의 표출을 지켜 볼 어린 아이들을기억해야 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회를 향한 비판적 사고를 담은 담론과 구호, 메시지 등은 공적인 말하기이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공적인 화자와 청자라는 뜻이다. 동네길에 내걸린 현수막은 공적인 메시지이기에 oo2리 주민들이나 무작위로 현수막을 보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공적인 말하기의 화자와 청자가 된다. 공적 말하기가 사적 말하기와 다른 것은 일정한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데 있다. 사용되는 언어와 표현방식이 예의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라면 어찌했을까. 어떤 말로 뜻을 전달했을까. 의도는 전하면서 품위를 담은 촌철살인의 표현은 없을까.갈등을 풀 다른 방식은 없을까. 돌아오는 발길이 몹시 무거워 걸음이자꾸바닥에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