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휴가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간밤에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교육청 강력 권고에 따라 학원을 2주간 닫는다는 문자였다. 다음 주가 월급이고 월급 다음 날은 카드 결제일인데 아마도 월급은 2주 뒤로 자동 연기될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어쩌나. 아이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하루의 시간 리듬이 출근에 맞춰져 있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근 10년 간 일 없이 쉰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강제로 2주를 쉬어야 한다. 늘 오늘은 집에서 쉬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강제로 쉬는 시간이 주어지니 황망스럽다.



오전 내내 그야말로 멍을 때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뒹굴거리며 영화 보고 책을 읽고 방해받지 않으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그러자. 밥은 가능한 간단히 먹고 바깥 약속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

삶이란 단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일 없이 늘 번잡한 일이 발생한다. 예상치 않은 일로 허둥대게 만들고 끊임없이 챙겨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삶은 엄격하여 의무는 그대로 지운 채 일탈에 대한 자비는 없다.

원하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또한 어쩌랴. 계획하지 말자. 물론 잘 되지 않겠지만 그러자.

일단 영화 한 편을 보며 생각하자. 그래서 고른 것이 제인 에어다.


나보다 7살 위인 언니는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눈이 크고 얼굴이 예뻤던 언니는 늘 화가 나 있었고 가족들은 가능한 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 낭만적인 꿈으로 가득 찼던 언니는 가난한 집안 형편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독서였다. 언니는 친구네서 금테 두른 세계 문학 전집과 한국 문학 전집 등을 빌려 밤을 새워 독서를 했다. 언니와 함께 방을 썼던 나는 자연스럽게 언니가 읽던 책을 읽었다. 고등학생 언니가 읽던 책을 초등생인 내가 읽었으니 그저 글자만 읽던 독서였다. 데미안이나 페스트 같은 것은 대충 읽었으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읽은 책을 내가 읽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언니는 제인 에어와 상록수 두 권을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언니가 나에게 책을 골라 준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내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을 골랐으리라. 그 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제인 에어를 다 읽었다. 제인의 절망과 불행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대저택에서 밤마다 들리는 괴성은 공포 영화보다 더 내 심장을 오그라들게 했고 시각을 잃은 로체스터에게 돌아가는 장면에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제인으로 살았다. 중3 때 다시 읽은 제인 에어는 영화 포스터의 문구대로 운명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삶은 늘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소에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살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저택 앞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 정원을 사색에 잠긴 제인이 산책을 한다. 처음엔 삶이 제인을 무자비하게 끌고 다녔지만 무너지지 않는 내면을 지킨 제인은 결국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중년이 된 내가 만난 제인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채 홀로 산책하는 모습이었다. 얼핏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고독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제인. 가슴 속엔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의문과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삶을 이해 할 수 없으나 묵묵히 걸어감으로써 알 수 없는 삶을 극복하는 것 같은 모습. 삶이 도전처럼 우리에게 내미는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제인.


자가격리 2주는 그렇게 묵묵히 걸어야 하는 길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