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바깥으로 나간 게 언제더라. 사회적 거리두기로 출근은 물론이고 성당의 미사도 중단되었다. 벌써 두 번째다. 아들의 결혼도 코로나로 인해 미뤄졌다가 겨우 식을 올렸는데 두려운 마음이 커진다. 행정 명령으로 학원도 휴원에 들어간 지 2주가 넘었다. 그런데 한 주를 더 휴원 한다고 한다. 매스컴은 연일 집에만 있으라고 경고를 하고 외출이 제한되어 집에만 있는 시간이 2주를 넘었다. 더욱이 내가 사는 곳은 도시가 아니어서 집 앞에 편의점이나 작은 마트조차도 없어 잠깐이라도 나갈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 퇴근하는 저녁때까지 나는 홀로 지낸다. 그동안 정해진 시간의 재촉 없이 책을 읽고 음악도 들으며 글도 쓰고 좋았다. 올 해는 휴가도 없이 일을 했기에 좋지 않은 시기지만 나는 몇 년 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곧 무력감이 생겼다.
몸이 축축 처지며 짜증과 함께 이상한 무기력이 밀려든다. 수영을 못한 지 6개월, 숲길 산책도 잦은 비로 멈춘 상태다. 바쁠 땐 오히려 집안일도 후다닥 해버리고 출, 퇴근 짬짬이 밭의 김도 매주며 마당엔 풀이 자라지 않도록 오며 가며 뽑아주어 깨끗했다. 의도치 않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나름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진짜로 병에 걸린 듯 몸이 지쳐 자꾸 널브러진다. 평소의 생활이 더 고단했는데 여유 있게 집에만 있는 생활이 더 피곤한 이유는 뭘까. 만사가 귀찮은 이 무기력함과 권태가 견디기 힘들다.
쇼펜아우어가 그랬다. 인간에게 100%의 행복이 주어지면 오히려 인간은 불행해진다고. 마치 단 초콜릿을 계속해서 먹을 때 한 조각의 초콜릿을 먹을 때의 행복과는 다른 지긋지긋함을 느낀다고.
음악도 영화도 책 읽기도 시들하고 코로나 뉴스도 싫증 난다. 이럴 때 무념무상, 킬링 타임 하기에는 풀 뽑기만 한 게 없다.
시골에서는 처서를 전후로 집 주변의 풀을 마지막으로 제거한다. 처서가 지나면 비는 많이 내리지 않고 아침저녁 기온도 떨어져 풀들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르게 내버려 둔 풀이 제법 자라 마당이 지저분하다. 잔디밭에도 풀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남편의 예초기가 갈 수 없는 곳은 손으로 뽑아주어야 한다. 마침 비까지 온 터라 풀 뽑기에 적당한 타이밍이다. 모자를 쓰고 찬 물을 준비 해 마당으로 나간다. 등에 내리 쬐이는 햇살이 여전히 뜨겁다. 허리를 숙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세 땀이 비 오듯 하고 풀벌레 소리나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풀을 뽑을 땐 무서운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에 청각이나 후각 같은 감각은 잠시 무뎌지는 것 같다.
심은 일도 없고 돌보지도 않건만 어찌 이리 잘 자라나는지.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내가 느슨해질 때 다시 고개를 드는 나쁜 습관이나 생각처럼. 이리 입을 앙 다물고 뽑아도 적당한 환경이 되면 잡초는 또 나온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거나 모든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둘러싼 의무나 역할에서 슬쩍 발을 빼고 싶을 때, 사는 일이 고단해 손을 놓고 싶을 때 내 안의 잡초는 순식간에 무성해진다. 어린 잡초는 길이가 짧아 뽑기 힘들고 많이 자란 잡초는 뿌리가 깊고 단단해 뽑기 힘들어진다. 잡초라도 뽑아버리기 적당한 때가 있다.
골반과 허리가 아파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내가 지나온 곳은 정갈하고 단정해졌다.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야 하는 자세가 고통스럽지만 풀 뽑기엔 야릇한 희열이 있다. 일이 끝난 후의 샤워도 운동 후의 샤워처럼 기분을 좋게 해 준다. 마당의 풀은 뽑았으나 내 안의 잡초는 어찌 뽑아야 할까,
코로나 블루를 견디는 또 하나의 방법.
풀 뽑기.
풀 뽑기 전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