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돌아 봄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계절을 전송하러 동네 입구에라도 나간 것일까. 매미 소리가 아스라이 멀다. 혹 매미가 떠나는 것일까.


햇살이 쨍한데도 시원하다. 갑자기 '사위가 캄캄해지며' '소년과 소녀'에게 내렸던 것처럼 소나기가 사납다.

성실한 지구는 가을로 안내하고 자본주의 홈쇼핑은 발 빠르게 가을을 팔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파란 하늘. 산 꼭대기로 물안개 기둥이 천천히 하늘로 치솟고 있다.

주변이 너무도 적막하여 마치 어디 먼 고장으로 떠나와 있는 것만 같다. 그림일기를 쓰느라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세월 속에 있는 한 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7년부터 시작한 것이 이제 4권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대부분은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내 탓보다는 남의 탓, 성공보다 실패,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 슬프고 괴로운 날에만 일기를 쓴 것이냐. 아버지 돌아가신 기록은 '아, 아버지....' 뿐이다. 다시 마음이 저리다. 정작 기록했어야 하는 일, 예를 들어 고딩 아들이 학교를 때려치우겠다며 떠난 8일간의 무전여행 같은 것은 간단히 기록했다. 다시 무너지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대학에 무사히 들어간 기쁨이나 집을 짓고 이사한 기록은 단 몇 줄 뿐이다. 심지어 큰아이 결혼에 관한 기록은 한 줄에 그쳤다. " OO이 무사히 결혼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반면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숲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 해가 꼴깍 넘어가기 직전의 어두워지는 산의 모습, 폭설이 내린 날 걸어서 소나무 숲을 지나 미사에 가던 일, 뒷산에서 들리는 딱따구리 소리가 한 가지가 아니란 점, 우연히 아주 가까이 다가 온 까마귀와 eye contact 한 이야기들은 길게 할애를 했다. 돈이 떨어졌다며 책을 주문한 일 등에선 실소가 나온다.


일상에 묻혀 사는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자주 잊는다. 그럴 때 일기를 읽는다. 일기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낙담하고 분노하며 어디에 마음을 쓰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들의 결혼에 말을 아낀 것은 마음이 그만큼 서운하다는 것. 서운하다는 속내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소모적인 감정만 키울 테니까 말을 아낀 것이다. 집을 지은 기쁨보다 갚아야 할 대출에 대한 부담 때문에 또 말을 아꼈을 것이고. 그러나 숲의 모습이나 노을에 잠기는 산의 어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좋아하는 음식을 허리 풀어놓고 마음껏 먹는 것 같은 포만감으로 만끽한 것이다. 그러니 말을 많이 했을 것이다. '만끽'이라는 말은 바로 배부르게 실컷 먹는다는 뜻 아닌가. 녹록지 않은 인간의 실존으로 매일 살아내야 하는 우리가 만끽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되니까. 아름다운 생물 예찬의 까마귀 일기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고 연민 가득한 이웃의 이야기엔 내 자신에 대한 연민도 숨어 있어 여전히 짠하다.


오늘은 그림일기와 일기, 둘 다 적는다. 그림일기엔 일기의 이야기를, 일기엔 그림일기의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