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부모님께서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인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하셨다.그런데 우리 집도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동정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서로 멸시한다. 연민이나 연대의식은 말뿐.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계층을 나누어 자신보다 더 가난하다고 생각되면 그 가난 앞에서 무례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다.
처음 인사를 드린 날, 남편은 부모님 앞이라고 안 그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 더 말을 아꼈다. 부모님은 그런 남편이 미덥지 않았다. 사내답게 큰 소리도 좀 치고, 자신 있다, 잘 살겠다, 해야 하는데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남편을 보시고 '사내 녀석이, 성격이 까칠한 것 같다, 왜 웃지 않느냐' 등 마이너스 점수를 매기셨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팍팍 티를 내는 어른들 앞에서 어디 웃을 여유가 있었을까. 그즈음 동네가 다 아는 부잣집에서 나를 며느리로 달라고 하던 참이니 남편은 시작도 전에 1패를 당했고 부잣집 혼처를 마다한다며 어리석은 헛똑똑이라고 부모님은 화를 내셨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는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수는 없었다. 나는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스물여덟 살이었고 직업도 있었기에 스스로의 결혼을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내겐 없었다. 숱한 드라마의 단골 메뉴였던 결혼 반대 스토리가 평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나의 결정과 태도는 '나 다운 것'이기도 했다. 남편과의 결혼은 그 누구의 강압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이었으므로 결혼도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위 될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유감이었고 죄송하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정한 남자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서 나를 선택한 사람이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양가 부모님 상견례가 이루어졌고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남편도 나도 돈이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우린 둘 다 비혼주의자였다. 그런 사람들이 결혼비용을 모아둘 리가 만무했고 부모님께서는 내게 괘씸죄를 물어 결혼 비용을 한 푼도 지원하지 않으셨다. 할 수 없이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학비로 쓰려고 계를 붓고 있었는데 그 계를 담보로 선배 언니에게 500만 원을 빌려 결혼 준비를 했다. 혼자 그릇을 사고 혼자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갔다. 위로 언니가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고 올케 언니와는 신혼살림을 함께 쇼핑할 만큼 가깝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더불어 내 결혼 준비를 모른 척하셨고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자격지심이었다.
가끔 결혼을 준비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쓸쓸해진다. 천애 고아였던 기분이 다시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가구를 사고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접시를 고르며 고아라는 생각을 했다. 혼자 결혼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대부분 친정 엄마와 투닥거리며 다니거나 혹은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신혼살림을 마련하고 결혼 준비를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버님은 작고하셨고 시어머니는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남편의 큰누님께서 한복과 두루마기를 준비해 주시는 정도가 다였다. 우리는 양가에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결혼식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 신랑이 사라진 것이었다.
당시 남편은 선배와 함께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선배가 사무실 보증금을 빼서 잠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은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서울과 지방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 선배를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고 그가 벌여놓은 사무실 뒤처리를 하느라 혼이 나갔다. 결혼할 돈도 없는 처지에 고용된 인부들 밀린 임금을 해결하는 것은 그에게 큰 고난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연락이 두절된 신랑을 기다리며 피가 말랐다. '이 결혼을 엎어야 하나, 부모님과 주변에 뭐라고 하지,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구나. 그는 비혼주의자가 맞았어.' 절망스러웠다. 남편의 주변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결혼식은 후다닥 다가오고 부모님께서 함에 대해 물으셨을 때 도망가고 싶었다. 함은 결혼식 전 날에 예정되어 있었다. 예물도 들어있지 않은 함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흉내는 내야 했으므로 나는 연락 없는 신랑을 기다리며 내가 받을 함에 넣을 반지와 시계(우리 예물의 전부였다), 옷과 화장품을 스스로 사서 함에 넣었다.
결혼식 이틀 전, 함이 들어오기로 한 전 날, 나는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오히려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결혼식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장만하느라 집안은 분주했고 그 모습은 이미 잔칫집이었다. '아, 인생에서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아, 이런, 젠장, 이 무슨 미친...영화 같은 삶이냐.' 속으로 자조했다. 한 푼의 지원도 없이 내 결혼식 준비엔 무관심했던 부모님께서 당신들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내게 코미디 같았다. 누굴 위한 결혼식이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내 짐을 싸서 양손 가득 가방을 들고 우리가 살 신혼방으로 옮겼다. 결혼식은 취소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신혼방으로 기어들어가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결혼식 못 해요. 신랑이 사라졌어요."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아버지께 말씀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술이 필요했다. 가슴이 마구마구 쿵쾅거렸다. 두 번째 맥주잔을 비울 때쯤 거실 전화가 울렸다. 신랑이었다.
그때 남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 갔었냐?" 라거나 "결혼을 할 거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00 씨예요? 내일 함은 누가 지고 오나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함은 다음 날 얌전히 들어왔고 그다음 날, 이른 추위가 닥친 11월 끝에 나는 결혼을 했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에도 이 일은 지금까지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눈치 빠른 올케가 짐작을 하는 듯했지만 우린 서로 모른 척했다.
"다시 결혼을 한다면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은가"란 질문에 마음이 먹먹했다. 혼자 결혼을 준비하던 그때의 외로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할까. 결혼을 엎었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영희와 철수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다시 결혼을 한다면 부모 형제들의 다정한 축복을 받으며 외롭지 않은 결혼식을 하고 싶다. 결혼식장이나 성당이 아닌 소박하게 꾸민 우리의 집에서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 하객들에게 우리가 살 집을 보여주고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싶다. 남편과 내가 직접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 드레스 코드대로 차려입은 친구들이 준비한 선물을 행복한 마음으로 열어보는 상상도 한다.
그런 다음 친구들과 찍은 우리의 결혼식 사진을 들고 부모님을 찾아가 우리가 이렇게 함께 살기로 했고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았으니 부모님과 형제들도 우리를 축하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동안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음식을 준비했으니 오셔서 우리가 마련한 집도 보시고 음식도 즐겨달라고 하겠다. 우리가 얼마나 알뜰하고 지헤롭게 살림살이를 장만했는지 자랑도 하겠다. 이 감자깎이는 골목 안 작은 마트에서 샀으며 이 테이블보는 동대문 시장에 가서 만원 어치 원단을 사다가 만들었고 저 삼각형의 원목 시계는 후배 아무개의 선물이며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것은 비디오 플레이어인데 형부의 선물이다,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3년 전에 결혼한 아들은 스스로 결혼을 준비했다. 성당이 아닌 일반 예식장에서 신부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ㅋㅋㅋ 처갓집을 배려한 두 아이의 선택이었다. 부모인 우리는 초대를 받는 입장이었고 우리는 아들과 며느리를 위한 작은 선물들을 마련해 주었다. 아들 내외가 살 집의 계약금은 우리가 주었고 나머지 전세금은 아들이 마련을 했다. 며느리는 살림살이를 필요할 때마다 마련했고 일반적으로 무슨 세트를 사는 식의 소비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폐백을 받지 않았고 며느리 또한 시댁에 예단 같은 것을 보내지 않았다. 며느리의 친정 부모님은 조금 당황하셨다고 전해 들었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아들 내외가 자신들의 결혼식을 스스로 준비하고 진행한 것이 자랑스러웠고 무척 고마웠다.
이 질문을 받고 다시 이 글을 쓰면서 모종의 위로를 받았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원하는 결혼식에 대한 상상을 하니 과거에 뭉쳐있던 마음이 풀어지고 즐거워졌다. 흐뭇하고 행복하다. 오, 이런, 문득 이제야 이 질문의 의도를 알 것만 같다. 이 질문은 나를 치유하였다! 30여 년 전, 웨딩 샵에 홀로 들어가던 내 모습 때문에 더는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