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게 뭐지? 알고 있으면서도 매 번 묻는 것은 조금 다른 걸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선뜻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는 평소 조기 같은 생선을 좋아하셨고 돼지고기는 안 드셔서 소고기를 드셨는데.... 이가 안 좋으시니 부드러운 간식을 준비합시다.이것도 늘 하는 말. 현관 인터폰으로 방문 목적을 알리니 어머니 성함을 묻는다. 작은 방에서 어머님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 이름이 입가에 맴돌았다. 남의 집 귀한 딸을 가리키는 "영애". "영애"가 어머니 이름이다. 귀한 따님 "영애"는 이제 기억하는 게 별로 없으시다.
"똑똑"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요양원 봉사자가 모시고 들어 왔다.어머니는 잠이 덜 깬 듯한 눈으로 어리둥절해하셨다. 어머니 앞에 선 우리는 아들, 며느리가 아닌 낯선 사람들이다. "어머니"하고 어머니를 부르니 당신이 우리의 어머니인가 보다 하지만 모르시는 눈치다. 들고 간 우유와 카스텔라를 드리니 야금야금 끝까지 다 드시고 한 말씀하신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생각이 안 나요."
"괜찮아요. 어머니, 우리가 어머니를 알잖아요."
"엄마, 저 막내 00이에요. 이 사람은 엄마 막내며느리."
아들과 며느리를 천천히 훑어보시는 어머니,
"..... 네에....."
자신 없는 목소리.
무릎이 안 좋아 굽힐 수 없는 어머니의 왼쪽 다리가휠체어의 발판에 놓이지 못하고 앞으로 뻗어 나왔다. 삐죽 드러난발목이 유난히 가늘다. 흘러내린 양말을 올려주며 다리를 쓰다듬던 남편의 얼굴이 벌게진다. 마르고 건조한 어머니 손을 잡고 검버섯 핀 어머니 볼에 얼굴을 대고 아들은 사진을 찍었다.며느리는 버릇없이 어머니 머리를 쓰다듬으며연민도 꾹꾹 쓰다듬는다.빨개진 눈가를 자꾸 훔치는 남편을 피해먼 곳을 더듬던 눈이 흰 벽에 걸린 시계에 꽂혔다. 12시?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다. 3시가 넘었는데.... 시계가멈췄구나.... 어머니의 시간도 멈췄고.... 이 방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네.... 어머니 흐린 눈을 본다. 그 눈은 시간과 기억이 멈춘 텅 비고 컴컴한 공간처럼 보인다. 92세의어디쯤에서 멈추기 시작한 어머니의시간은 95세의 시간에서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가 자기 주위의 시간을 늦춘다고 한다.산꼭대기보다 평지의 시간이 더 느리게 가고 우리 몸의 머리보다 발밑에서의 시간이 더 느리다. 지구 중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시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된다.우리가 말하는 시공간은 없다고 한다.시간은 연속된 선이 아니라 흩어진 점이라고. 그래서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아들과 며느리가 사는 시공간에 놓인 것이 아니어서 멈춘 것일까.어머니는 요양원이라는 행성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채,아니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살고 계신건가.어머니의 기억은 연결되지 않고 흩어졌기에.
자꾸만 아들이라며, 아무개라며 주입하듯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00이, 00이"
하신다.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칩시다, 하는 듯이 "00이, 00이" 하신다. 아들은 그제야 웃는다. 엄마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자기 이름을 안다고, 기억하신다고 눈물 찬 눈으로 웃는다.
아들 이름을 불러주던 어머니, 곁에 선 여자에겐 미안한얼굴이시다.
"집이는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안 나요. 미안해요."
아들은 자꾸 제 이름을 말하고 기억 안 나는 이 여자는'누굴까? 누굴까?' 흐린 눈으로 자꾸 쳐다보신다.
늘 조용했던 어머니. 어머니는 말수가 적으셨다. 단 한 번도(정말이다) 시어머니임을 앞세워 며느리들을 꾸중한 적이 없으시다. 때로 동서형님은 그런 어머니께 자식들 야단 좀 치시라며 오히려 뭐라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미안해요."라고 하셨다. 한 번은 무엇이 미안하냐고 여쭈니 가난한 집에 시집와 당신 아들들과 살아주는 것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셨다.명절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돌아올 땐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오셔서 "고마워요." 하셨다.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하대하지 않으셨다. 그날 신문은 꼭 보셨고 음식을 만든 며느리들에게 커피 타 주라시며 소파에 누운 아들들을 밀어내시던 어머니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기억을 잃으시고 이젠 기억을 잃은 것이 미안하다고 하신다.
면회시간이 끝났다며 봉사자가 휠체어를 밀고 나가려는데, 어머니 몸을 돌려 내게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이렇게 살고 있어요.... 너무 오래 살고 있어요. 휴~~"
"어머니, 괜찮아요. 주변 사람들 너무 힘들게 하지 않으셔서 감사한 걸요. 잘 잡숫고 잘 지내고 계세요..."
"네에....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와함께 있는 동안30여분의 시간이 흘렀는데어머니와 만난 방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무심한 흰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방을 나설 때도 여전히12시였다. 차의 시동을 켠 남편은 우두커니 앞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