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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an 19. 2024

"눈 오잖아"

색연필 그림일기 2


수영의 낙을 꼽으라면 몇 가지를 댈 수 있다. 자유로움, 물아일체의 즐거움, 매일 루틴이 주는 기쁨 등이 있지만 또 하나는 친구들과 먹는 밥이다. 매일 밥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주당 두어 번은 먹는다. 간단하게 5,000원짜리 국수에서  짜장면에 탕수육, 수제비, 샌드위치 등이 단골 메뉴다. 동네가 좁다 보니 아쉽게도 식당의 메뉴는 한정적이다. 게다가 동네 식당들은 월, 수로 나뉘어 문을 닫는다. 월, 수를 피해 식당을 고르자니 어떤 날은 갈 곳이 없어 뿔뿔이 흩어진 날도 있었다. 유난히 배가 고픈 날은 머피의 법칙이 정확하게 적용되어 가고자 하는 식당마다 꼭 문을 닫았다. 그럴 때면 30여분 어난 이웃 지역으로 원정을 가기도 한다.


식사비는 철저히 더치페이다. 가끔 누군가 공돈이 생겨서, 새 차를 사서, 친구에게 수영복을 선물 받아서, 비가 와서 등의 구실을 삼고 한 명이 쏘는 날도 있지만 우리의 원칙은 더치페이다. 어쩌다 보니 일괄 계산은 내가 한다. 친구들의 폰뱅크 이력엔 내게 송금한 횟수가 많아서 자신들의 뱅크 맨 위에 내 이름이 있다고 했다.


물속에서 누군가 "눈 온다"라고 말했다. 2층에 위치한 수영장 통창으로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우리들 귀엔 물소리가 찰박찰박 거리는데 창밖으론 30년쯤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듯 눈이 내렸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눈은 얌전하게 천천히 펑펑 내려서 커다란 눈송이가 다 보였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나가자."

물에서 나오며 친구가 물었다.

"우리 밥 뭐 먹을 거야?"

"밥?"

"눈 오잖아."

"크크, 그려~ 짬뽕 먹으러 가자. 얼큰한."

"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길은 쌓인 눈으로 한가득이다. 동네 중국집으로 모자를 뒤집어쓴 채 엉금엉금 기어갔다. 우산과 모자에 "투툭, 투투둑" 눈이 떨어졌다. 머리에 멍드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며 우리는 짬뽕에 탕수육을 먹었다.

" 술 한 잔 할?"

" 낮술을 먹자고?"

" 술은 또 낮술이지. 정지아 작가가 쓴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 몽골 초원을 차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지막지한 폭설이 내린 거야. 현지 운전기사는 잔뜩 긴장해서 두 손을 움켜쥐고 앞만 보고 달려가더래. 여차하면 그 폭설에 갇힐 수가 있었던 거지. 몽골 초원에서 폭설에 갇히면 그냥 죽음이래.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수평의 초원뿐인 몽골에서 폭설이 내리는 중에 차가 멈추는 순간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는다고. 몽골은 그런 곳 이래. 정작가 일행은 긴장해서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들은 술꾼들이거든. 그 사람들이 뭐 했게? 배낭에 챙겨 둔 보드카를 꺼내 홀짝홀짝 마신 거지. '눈이 퍼붓는 설원을 달리우리는 천천히 보드카를 마셨다.'라고 썼더라고. 내가 그 구절에 밑줄 좍 그었잖아. 그러니 저렇게 눈도 오는데 보드카는 몰라도 맥주 한 잔 하세. 그게 예를 아는 사람의 도리지."

"ㅋㅋㅋㅋ"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맥주를 주문했다. 노란 병의 맥주는 달고 시원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맥주엔 짬뽕이지, 한 친구가 말했다. 고개를 드니 시야는 온통 회색이고 차와 사람들이 설설 기어 다녔다.

"커피는 어디서 마셔?"

"ㅋㅋ 아직 밥도 다 안  먹었다구."

"커피? 이런 날은 강이 보여야지. 그게 또 우리가 여기 사는 이유잖여."

"콜!"


커피집은 눈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조금 붐볐다. 들뜬 기운이 커피 향을 타고 넘실거렸다. 언 강 위에 눈이 내리는 풍경은 얼음 밑에서 검게 흐르는 강의 깊이를 따라 자꾸 깊어졌다. 더러는 웃고 더러는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눈은 자꾸 내려 추운 강물 위를 덮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강물인지 경계가 없었다. 낮술을 마시고 눈이 오는 풍경을 보는 친구들 사이에도 경계가 조금 더 허물어졌을까? 



눈 내리는 북한강변, 프리즈마 색연필 14*21cm 켄트지


* 정지아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중에서 인용함. 마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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