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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an 01. 2024

새 해가 떴다는데

색연필 그림일기 2


새해가 되었다. 어젯밤 보신각 주변엔 12만의 인파가 모였다고 했다. 팬데믹을 겪어서일까. 사람들은 오랜만에 그렇게 모이고 싶어 했을 거다. 작년엔 남편과 김치국수를 먹으며 새해를 맞이했는데 올 해는 맥주 두 잔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우리 집 개는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남편과 아들이 종을 쳤다며 차례로 와 새해 인사를 했다. 먼 길 조문을 하고 막 돌아온 남편에게선 안개 냄새가 났고 아들에게선 쿰쿰한 총각냄새가 났다. 그 두 냄새가 나를 감싸 안으며 주변에 떠돌았다.


맥주 두 잔 탓일까. 눈앞이 흔들렸다. 요즘은 자꾸 어지럽다. 맥주를 마시지 않아도 자꾸 어지럽다. 어지러우면 속이 메스껍고 그 메스꺼운 게 싫어 눈을 감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더 어지럽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앞은 잘 보이지 않는구나. 사는 이유도 잘 모르면서 계속 사는 이 생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새 해가 또 뜬다니 다른 건 몰라도 앞은 좀 잘 보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속도 울렁거리지 않고 그래야 눈 감지 않고 앞을 잘 볼 것 아니냐. 새 해가 뜬다고 새 바람을 품는 나는 또다시 어리석고 말지만 원래 나는 이렇게 줄곧 어리석은 채 살아왔다. 만일 내가 조금 지혜로웠다면 그 지혜를 믿고 사고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운 좋게 어리석은 나는 큰 손해를 본 것도 없고 손해를 끼친 것도 없다. 그저 고만고만한 생채기만 주고받았을 뿐이었지... 고만고만한 생채기인 것이 다행이지... 


보신각 종은 울렸다. 종소리를 듣겠다고 모인 12만의 사람들 그 24만 개의 귀에 보신각 종소리는 먼저 들렸겠다. 새 해가 뜨는 모습이 종소리로 들리고 그 소리 따라 하늘로 배달되는 각종 민원들, 소망들, 기도들이 올려다본 하늘의 별보다 많다. 새 해가 되었다고 불가능한 일들을 바라진 말자.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해서 청춘을 되찾겠다든가, 로또의 행운을 바란다든가, 누군가 내게 사과하며 화해를 청할 거라든가, 수영대회 나가서 우승하겠다는 그런 일들 말이다. 그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남의 책, 남의 그림, 남의 글만 읽다가 해 바뀌어 한 자락 써 보는, 다만 가능한 그런 일....

 


프리즈마 색연필, 14.8 ×2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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