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던 아이가 드디어 한 꺼풀 탈피를 시작했다. 잘하던 공부도 하기 싫고 매사에 의욕이 없다고 한다. 그저 건조한 음성으로 "네, 네" 하기만 한다. "네" 하고 말하는 아이의 행동은 '아니요, 하기 싫은데요.'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살기가 싫단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며 아이의 엄마는 뒤늦게 사춘기가 온 아들이 버겁고 밉다.
성적이 낮은 학생의 학습이 드디어 향상되고 있다고 믿었다. 수업 시간의 태도도 달라져서 내심 나의 성공을 기뻐하고 싶은데 영 찜찜했다. 망할 놈의 그 "촉"이 왔다. 부모님께 털어놓았다. 당신 아이의 공부가, 아니 문제풀이가 너무 완벽해요. 어머,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그... 아드님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사가 벌어졌고 그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그동안 아이는 선생인 나를 속이고 제 부모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며 공부를 아니, 답 베끼기를 하고 있었다.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답을 다운받았던 것이다.
팬데믹 이후 나는 현장 수업을 그만두고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기에 현장에서 맞닥뜨려야 알 수 있는 일정 부분에 대해선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수업의 한계라면 한계다. 그러나 학생들의 바쁜 생활에서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원하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일부 학생과 부모님들이요구하는 수업이기도 하다. 이 또한 선택의 문제다.
생김새만큼 다양한 양상과 개별적 특성을 보이는 아이들의 사춘기를 해마다 지켜보며 가르쳐야 하는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의 부비트랩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반드시 한 번은 터지고 마는 이 폭탄 앞에서 미리 예상한다고 해도 별 성과는 없다. 그저 터지면 수습하는 일이 최선이고 이 과정에서 모두가 힘들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는 성장의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춘기를 생의 한 과정으로 바라보게 하며 올바른 성장을 유도하는 것도 국어 수업 외 내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수업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의 사춘기와 함께 하는 우리 모두는 힘들다. 아이는 물론 착한 아들이라며 자랑으로 여겼던 부모도 힘들고 의욕이 사라진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선생인 나도 힘들다. 어느 날의 수업은 국어 수업이 아닌 인생 상담으로 채우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특유의 생동감으로 날마다 뒤통수를 친다. 휴강이라고, 선생님 여행 갔다고, 숙제가 없다고, 시험을 잘 보았다고, 숙제를 다 했다고, 치과 예약이 있다고 아주 뻥을 친다. 저를 낳아 기르고 한숨과 눈물과 함께 온갖 감정과 욕망을 꿀꺽꿀꺽 삼키며 받아주고 속아주고 참아주면서 간, 쓸개도 모자라 번 돈의 거의 전부를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하는 제 부모를, 경험 많고 나이 많은 선생을 속였다고 좋아한다. 때때로 아이들의 거짓말보다 말갛고 착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이 더 속상할 때가 많다. 매 번 겪어도 처음 당하는 일인 양 괘씸하고 어이가 없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처음 겪느라 힘들고 부모님들은 그런 자녀들을 그럼에도 믿고 기다려 주어야 하기에 애가 닳고 선생인 나는 놈들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해 주느라 두루두루 괴롭다.
그런데 얘들아, 우린 그렇다 치고 너 자신을 속이는 건 어쩔 것이냐. 너희들이 설사 어른들을 속이고 하늘의 신마저 속일 수 있어도 너 자신은 속일 수 없지 않으냐. 한 번은 훈계 대신 이런 말로 하소연을 했더니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린 녀석도 있었다. 설마, 그 눈물도 악어의 눈물이었나???
사춘기 아이들을 해마다 만나는 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니체의 이야기처럼 삶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범속한 인간이 니체의 초인이 되어 "오, 생이여! 또 왔는가.(오, 이놈들! 어서 오너라.) 까짓 거 또 한 번 열심히 살아주마.(까짖 거 기꺼이 또 네 놈들에게 속아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얘들아, 너희들은 해마다 크느라 사춘기를 겪고 청년이 되지만 이 선생님은 해마다 나이 들어 힘이 든단다. '초인'은 더더욱 될 수 없는 이 늙은 선생은 어쩌란 말이냐. 알고 싶지 않은데도 너희들의 말간 거짓말이 보이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아니 이놈들아,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