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스케치 그리고 쓰다
도대체 와인 따개가 어디로 간 것이냐. 출발부터 와인 따개를 책임졌던 M 씨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짐을 뒤지고 또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와인 따개를 보여주며 챙겨 간다고 자랑까지 했는데 뭔 일이냐. 각자의 짐을 뒤져도 없고 옆 숙소까지 가서 빌려 보려 했지만 와인 따개를 가져온 사람들은 없었다. 10여 분 작은 소동 끝에 H 씨가 근엄하게 말했다.
"찾지 마."
H 씨는 식탁에 놓인 젓가락 하나를 코르크에 대더니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 밀린다! 코르크 마개는 천천히 밀려 들어가다가 쑥하고 떨어졌다. H 씨는 젓가락을 다시 넣어 코르크 마개가 입구를 막지 못하게 누른 후 와인을 따랐다. 크~~ 공대 출신 맞네. 모두 엄지를 들어 그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휴대용 와인 잔을 꺼내 잔을 채우고 오늘도 무사히 잘 놀았음을 감사했다. Cheers!
그런데 와인 따개는 다음 날 옮겨 간 숙소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내 가방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와인 따개의 요정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이동을 해서 숨었다는 것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우리와 밀당을 하며 골탕을 먹이려고 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이 사람들 참 단순하다. 와인 따개가 발견되자 오늘은 손쉽게 와인을 마실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왜 네 가방에서 나오냐며 근원을 추적하지도 않았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와인을 정상적으로 마실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했다.
우리는 그랬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막상 여행을 가면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긍정적인 모습이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남 모르게 실망한다. 부정적인 모습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드러나지 않던가. 여행 내내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준 태도와 언어들은 이 여행의 참된 의미였다. 언어는 그 사람이고 그의 태도로 이어지며 가감없이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타인을 향한 배려와 크고 작은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쉬운 일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을 관찰하고 미리 보살펴 주는 안목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안목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돌봄에서 온다. 학습하고 훈련된 것과는 다른 점이 이것이다. 세심함이 필요하고 관대해야 하며 때로는 못 본 척 해야 상대가 부담을 갖지 않는다. 타인이 보여준 배려나 희생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도 겸손의 일부다.
우리는 여행 내내 그랬다. 6일은 너무 긴 거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는 여행이 지루할 것이라는 걱정이 아니라 함께 갔다가 따로 오는 관계에 대한 염려였고 우리는 함께 갔다가 웃으며 함께 돌아 왔으니 멋진 경험을 한 것이다. 여행의 멋과 가치는 사람을 빼놓곤 말할 수 없다.
"글은 쓰는 사람의 인생과 캐릭터의 반영(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편성준)"이라고 했는데 이 문장을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의 인생과 그 캐릭터의 반영이 여행의 질을 좌우한다고.
(4부로 건너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