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와요"-무의미한 기다림은 없었다

필사하며 나누며

by Eli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분석하지 않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생활의 가장 큰 의미는 대부분의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여러 원인을 거쳐 마침내 나타난 결과에서 드러납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의미를 부여하면 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합니다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샹바오) -


질문 : 의미 없다고 느꼈던 시간들 중 지금 보면 달리 보이는 순간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의미를 부여하면 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합니다."


기다리는 걸 잘 못 한다. 그 시간이 의미 없다고 여겼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기다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기다림을 피해왔다. 기다릴 때는 기다리는 일 외에 다른 할 일이 없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과 공간, 일이나 상황 안에서 내가 제약당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더 싫었다.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대부분 5분 일찍 도착하려고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리 일을 처리해 버리기도 했다. 약속을 쉽게 바꾸거나 5분이나 10분 정도는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싫어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의미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기다리고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이미 엎어진 일을 다른 기대를 품으며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형벌이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이 있을까(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그랬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기다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기다림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의 이가 나오고 걸어야 할 때 걷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그저 오는 때가 아니었다. 기다림이 충만할 때 기다리던 일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조급함은 슬픈 나의 본성이었다. 큰애는 다섯 살이 다 되어서야 말을 했는데 나는 큰애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림을 멈추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있던 내게 큰애는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걸었다.

"엄마, 뭐 해?"

완벽한 문장이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기다리는 동안 애써 외면했던 내 두려움. 입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였던 그 기다림. 조급한 내 본성과 상관없이, 속절없이 흘러만 가던 그 기다림. 그건 지금도 무섭다. 큰애는 엄마가 기다리는 동안 완벽한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이 가득 차야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은 두려움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기다리는 일에서 어찌 보면 나는 완벽한 '을'이었는데 큰애가 더듬거리거나 어눌한 단어가 아닌 완전한 문장으로 처음 말을 하던 날, 기다림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기다림엔 이유가 있다고, 이토록 감격스럽고 달콤한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차가 고장 나 수리를 맡겨서 버스를 타야 했다. 하루에 여섯 번 오가는 버스는 오기로 한 시간에 오지 않았다. 버스를 타지 못하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택시비는 버스 요금의 10배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해하고 있는데 함께 기다리던 동네 할머니께선 느긋하게 정류장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시며 한 마디 하셨다.

"올 거예요."

"안 오는 거 아닌가요?"

"늦어도 와요. 좀 기다려 보세요."

나는 연신 시계를 보았고 할머니는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버스는 13분이 지나서 왔고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평소엔 텅 비다시피 하는 버스인데 그날따라 승객들이 많아서 지체된 거였다. 늦는다는 것에 시선을 두면 기다림이 고역이고 온다는 것에 두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기다림은 이브 Eve이다. Christmas Eve, New Year's Eve 등의 이브는 '어떤 중요한 날의 전날 저녁(evening)'이라는 뜻인데 단순히 전날이 아니라 다가올 날을 맞이하기 위한 직전의 시간이다. 다가올 시간 직전! 그 시간은 얼마나 큰 설렘과 기대를 품고 있는가. 이브라는 그 시간의 분위기와 기다리는 마음의 들뜬상태를 상상해 보라. 기다린다는 것은 앞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이고 설렘 가득한 희망을 품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역시 그가 오기 전에 품는 기쁨이자 그를 향한 환대이다.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도 기다림이 있어야 가능하다.


잘 기다리는 사람은 서둘지 않으며 믿음을 잃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다림 너머의 기쁨을 미리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다. 그런 사람에겐 여유가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과 다가 올 시간 사이의 여백을 볼 줄 안다. 무분별했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시간들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무의미한 기다림은 없었다. 기다리는 것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기다림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그를, 그것을 원했으니 기다렸던 것이다. 기다림은 다른 게 아닌 나의 모든 소망이었다. 나는 스스로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그것이 기다림이었다. 두 손 놓고 그저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조급한 성품 탓으로 힘들었지만 기다림이 실현되어 눈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아름다운 현실은 다시 없었다.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분석하지 않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는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여러 원인을 거쳐 마침내 나타난 결과에서 드러납니다."




※배경사진 출처-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