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교걸, 유교보이 라는 밈이 떠돈다. 옷차림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 한편으론 고루하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유통되는 듯 하다. 이렇듯 유교는 우리에게 양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한편 아직까지 유교라는 말이 밈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2500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서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유교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배병삼은 유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변론에 나선다. 우리가 지금 유교라고 생각한 것이 정말로 유교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공자가 세상에 다녀간 지 2500여년이 흘렀으니 우리가 가진 오해는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 세월 속에서 지배세력의 통치 이념으로 변용되어 피지배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아랫사람을 훈육시키고 복종시키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병삼은 무엇이 억울해 유교를 변호하고 나서고 있는가?
'극기복례'를 두둔하고 나선다. 극기..는 에고의 극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나와 너를 구분짓고 너를 나의 도구로 삼는 에고 덩어리를 극복해서 툭트인 마음으로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라고 한다.
복례..는 '위하지 않는' 곳이다. 복례는 너를 위하여 나를 소모하지도 않고 나를 위하여 너를 수단화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다. 따라서 '극기복례'라는 것은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자신의 에고를 극복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위한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던가 ? 배병삼은 위한다는 것은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각속에는 나를 희생하여 베푼다는 의식이 깔려 있고, 이 베푼다는 의식 속에는 반대급부의 바람이 씨앗처럼 잉태된다고 한다 . 이 '위하여'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제 스스로 상대방보다 지위든 생각이든 재산이든 우월하다는 우월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위해서'는 '나를 위해서'의 굴절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민'을 해석하면서 그의 비판의 날은 더 서슬이 퍼래진다. '위민'이란 군주가 국가의 소유자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자기 소유물을 백성들에게 시혜로 베풀 적에야 '인민을 위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민정치는 전제정치보다더 사악한 형태라고 할만하다고 한다. 맹자는 위민 대신에 '여민'을 제안한다고 한다. 여민정치가 실현되는 나라는 '우리의 나라' '군주와 인민이 함께하는 나라' 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을 위하여 정치한다'는 망상에서 깨어나 본시 천하는 인민의 것이었으며, 군주는 공동체의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본연의 위상을 회복해야한다는 것이다.
저자 배병삼으로 인해 유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풀렸다. 세계화가 진행될 수록 또 세계가 우리를 주목할 수록 우리 성정에 DNA처럼 내재된 유교의 잔재를 새롭게 조망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상당한 문제가 유교로부터 굴절되어 기원되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지만 반면 지금 우리의 눈부신 문화가 유교의 거대한 기획 안에서 일어났기에 더 폭발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유교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본격적으로 대선 레이스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보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때 보다 크게 들린다. 누가 '위민'을 말하고 누가 '여민'을 말하는지 혹은 행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