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Oct 19. 2018

내가 사는 미국, 그들이 사는 미국

Living in a bubble

2년 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곳 워싱턴 DC에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내 모든 직장 동료들과 학교 동기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내 집주인까지 트럼프의 행동에 혀를 차면서도 그가 실제로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투표 당일에 대학 동기는 선거 viewing party가 있다면서 내게 같이 갈 거냐고 물었다. 개표가 끝나면 즐거운 뒤풀이 장소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사정상 고사하고 집에 와서 TV로 개표 결과를 시청했다. 개표 초반이라 그런지, 트럼프가 꽤 많은 주에서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시간이 지나도 잘 뒤집어지지 않았고, 옆에서 지켜보던 와이프가 "뭐야... 무서워. 이러다가 진짜 트럼프가 되는 거 아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nbc방송 앵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초조함과 불신이 뒤섞인 표정으로 "Too Close to Call!"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화면상으로는 전혀 접전이 아니었는데, 트럼프가 안정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도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다음 날, 회사에는 충격으로 출근하지 않은 젊은 컨설턴트들이 꽤 있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전날의 선거 viewing party는 경쾌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가 이내 급격히 반전되었고, 급기야는 몇몇이 울음을 터뜨리는 극도로 우울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뒤풀이 장소가 나이트클럽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분위기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미 알겠지만, 이곳을 포함한 미국 동/서부 대도시와 나머지 내륙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내가 사는 DC 지역 역시 동부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인종의 용광로 (melting pot)'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내 직장은 물론 출근길 지하철과 DC 곳곳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버를 불러 탈 때마다 기사의 출신 지역을 물어보곤 하는데 대부분 이민자들이고 한동안 국적이 겹치는 기사를 찾기 힘들었을 정도로 다양하다. 유학생활을 한 보스턴 지역은 본래 백인 비중이 높은 곳이기는 하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 캠퍼스나 학교 주변인 캠브리지 인근 역시 국적/인종적 다양함에서는 DC 못지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성의 가치가 중시되고 보수 (기존의 질서와 문화를 지키려는) 성향보다는 진보 (새로운 사람, 제도,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성향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사실 미국에 온 이후로 '나는 여기서 이방인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거나 인종차별을 경험했다거나 한 일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드물다 (아, 내 와이프는 길거리 걸인에게서 "Go back to China!"를 한 번 들은 적이 있다고 하긴 했다).


그러다 가끔 내 좁은 생활 반경을 떠나 교외 지역으로 나가 보면 내가 여태껏 미국에서 살아온 곳은 '섬' 내지는 '버블'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유학 시절에는 뉴햄프셔로 운전해 갈 때가 있었는데 그곳 식당에 갔더니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이 지긋한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들 모두가 유일한 유색인종인 나를 흘끔흘끔 바라봤다. 그 누구도 나에게 "Go back to China"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위아래를 훑는 눈빛만으로도 나는 이방인이라는 그 느낌에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얼마 전 델라웨어 법정에 갔을 때에도 나 혼자만 빼고 그 법정 안의 모든 이가 백인이었는데 역시 평소와 달리 약간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DC 근교인 버지니아 내에서도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DC 인근에서는 Subway나 McDonald's 등 저렴한 가격대의 패스트푸드 점에 가면 직원의 대부분이 히스패닉이라고 보면 맞고 나머지 직원들도 흑인이나 아시아인 등 소수민족 이민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버지니아로 한두 시간 운전해서 들어가면 그곳에선 나이 든 백인 아주머니들이 샌드위치도 말아 주고 캐셔 역할은 물론 청소도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당연할 그 광경이 나에게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어색하다. 대통령 선거 때 보면 버지니아 주는 DC에 가까운 NOVA (Northern Virginia) 지역만 파란색 (민주당 지역)이고 나머지는 전부 빨간색 (공화당 지역)이었다. DC에서 보이지 않던 그 많은 백인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런 비 도시지역에 살면서 반대로 나 같은 사람이 보이면 '언제부터 저런 애들이 내 나라에 이렇게 깊숙이 들어와 살고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걸까' 라며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분 탓인지, 트럼프 당선 이후에 DC에 “Make America Great Again” 붉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가족들이 더 자주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지방에서 DC로 서울구경 온 사람들인데 이들 덕분에 DC에 살면서도 이젠 좀 더 현실감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들은 나와 딱히 말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상은 미국 만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땅에 살지만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탄핵을 거치며, 또 각종 사회 이슈에 대한 논쟁들을 거치며 모두들 알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 또한, 예컨대 영국도 브렉시트 사건을 거치며 이런 사회적 분열 현상을 발견하고 또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도시지역 vs 비 도시지역, 젊은 세대 vs 기성세대, 진보세력 vs 보수세력, 친-다인종 vs 반-다인종 등) 이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도시 지역과 비 도시지역의 변화의 속도 차이가 아닐까 한다. 이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하고 있는데, 대도시 지역은 다양한 차원에서의 변화가 실시간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반영되지만 비 도시지역은 변화가 빨리 반영되지 않거나 또는 그런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치와 문화의 차이가 쌓여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앞으로 가속화되고 분열은 더욱 극명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통/통신기술은 전례 없이 발달했는데, 오히려 공감대 형성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듯한 세상이다.

아니면 교통/통신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줄 모르고 각자의 영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빈번하게 부딪치게 되는 것일까? 



* '그들이 사는 미국'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 Anthony Bourdain: Parts Unknown의 West Virginia 에피소드 (S11E01)를 추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