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어마'의 북상과 새들의 대처

벌새와 나의 이야기 10-13

by 최리라

쿠바와 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 '어마(Irma)'가 북상중이며 다음날 새벽 조지아를 지나갈 거라고 했다. 하루 전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심상찮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국을 10년 가까이 겪어보니 자연현상 앞에서 인간과 인간이 지은 모든 것이 얼마나 하찮고 나약한지 절감하게 되었다. 대륙을 가로질러 폭주하는 바람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할퀴고 부수고 날려버렸다. 다행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지만, 하룻밤새 집앞의 거대한 나무가 찢어지고 쓰러지면서 바로 옆집 지붕을 덮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로는 키 큰 나무를 보면 '아름답다'가 아니라 무섭다는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 그들이 태풍의 마수에 걸려 미친 듯이 헤드뱅을 하다가 사람과 건물과 자동차를 덮치는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잔잔한 바람 속에선 그토록 평온한 나무들이 말이다.


2F2A8625.JPG 새들(벌새보다 큰 새들)을 위해 떠다 놓은 물그릇에 소나기가 내리는 모습

나의 걱정과는 달리 존스노우는 그날 아침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피더에서 넥타를 배불리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금속 스큐어에 앉아 잠시 망을 보더니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철새여행을 앞둔 시점답게 존스노우의 몸은 꽤나 통통해져 있었다. 평소에는 15분에 한번씩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벌새가 논스톱으로 몇 시간씩 날려면 그 정도의 에너지를 비축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오전 내내 존스노우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존스노우가 자리를 비운 새 온갖 청소년 벌새들이 존스노우 흉내를 내며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내 짐작으로는, 그나마 철새여행을 경험해본 존스노우는 경험자답게 태풍이 오는 걸 예감하고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것 같았다. 반면, 올해 태어나서 아직 태풍을 겪어본 적 없는 청소년들은 그저 꿀통이 자기들 차지가 된 게 기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2F2A8638-best.JPG 처마밑에 달아둔 피더에 와서 비를 피하면서 식사하는 벌새


집도 없는 작은 새들이 어떻게 태풍 속에서 살아남는지 궁금해서 태풍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조류학자 마이클 로메로의 설명에 따르면, 새들은 상대적으로 몸이 작아서 강풍의 피해를 적게 받는다고 한다. 대체로 태풍이 오기 직전에 실컷 먹어둔 후 곧 활동을 자제하고, 작은 나무 틈이나 돌 틈, 두꺼운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는 것이다. 새들의 혈관 시스템(counter-current exchange)은 인간과 달라서, 차가운 땅을 딛고 있는 발의 차가운 피가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몸의 따뜻한 피가 먼저 차가운 피를 데우기 때문에 계속 체온 손실 없이 몸을 데울 수 있고, 작은 발에만 차가운 피가 흐르지만 그게 체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발은 어차피 차갑기 때문에 차가운 온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100%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한겨울이면 온몸을 동그랗게 부풀린 새들이 쇠꼬챙이 같은 검은 발로 눈을 밟고 지나가던 풍경을 떠올렸다. 깃털을 부풀려 공기를 완전히 가둘 수 있는 구조도 새의 체온을 지켜준다. 폭풍이 왔을 때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새들은 몸에 지방을 가장 많이 축적해둔 새들인데(그래야 한참동안 안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단점은 그럴 경우 행동이 느려져서 천적의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가 있는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보니 존스노우가 안 보이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리한 존스노우는 새들의 교과서대로 넥타를 실컷 먹은 후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거나, 이참에 철새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남쪽에서 지금 엄청난 허리케인이 올라오고 있으니 지금은 떠날 시기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2F2A3067-best.jpg 자기들끼리 피더를 차지하게 되어 신난 청소년 벌새들


처음에는 존스노우가 저 어린 청소년들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도망친 건가 싶어 마음이 언짢아지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알고보면 식물들과 수많은 동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새들은 인류보다 더 오래된 생명체들이다. 재난 속에서 걱정해야 할 건 온갖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은 새들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문명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게 된 인간들이다. 우리가 사는 곳도 어찌 될지 몰라서 일단 마트에 가서 물과 비상 식량을 사다 두었다. 전기나 수도가 끊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큰 통에 수돗물도 채워놓았다. 틈틈이 뒤뜰을 내다보니 카디널, 브라운뜨래셔, 타우히, 모킹버드들이 통통하게 몸을 부풀린 채 어떻게든 더 배를 채워두려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밤이 되자 지붕을 뚫을 듯한 기세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큰 나뭇가지가 전선 위로 쓰러지면서 전기가 끊긴 지역이 생겨나고 있었다. 인간이나 새들이나 내일 하루가 고비인데, 그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다시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2F2A8620.JPG 점차 불어나는 빗물
2F2A2951-best.jpg 아직 허리케인이 뭔지도 모르는 청소년 수컷 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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