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같은 의지의 청소년 '스톤'

벌새와 나의 이야기 10-15

by 최리라

새들에게도 꿈과 현실의 구분이 있을까? 새들도 잠을 자면서 꿈을 꿀까? 벌새처럼 밤마다 '토포(torpor)'라 불리는 일종의 동면 상태에 빠져들었다가 해가 뜨면 되살아나는 새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구분은 무의미할 수 있겠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무릅쓰고 철새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그들이 용감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에게 현실로 보이는 삶이 그들에겐 단지 꿈속에 불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도 현실을 꿈처럼 인식한다면, 잠자면서 꿈꾸는 시간을 깨어있는 시간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존스노우가 태풍에 떠밀려 남쪽으로 떠나버린 후(설마 태풍 따위에 휩쓸려 죽거나 하진 않았을 테지), 빈둥지가 된 내 마음은 온갖 의문으로 가득찼다. 아침마다 내가 심어둔 나팔꽃 넝쿨 사이에 앉아서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던 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존 선생님은 존스노우가 내년 봄에 꼭 돌아올 거라고 위로해주셨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블로그 친구 눈바람꽃님은 벌새가 너무 그리우면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고까지 말씀해주셨다. 그곳에는 겨울에도 여러 종류의 벌새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 넘은 아줌마가 러블리즈의 '어제처럼 굿나잇'을 흥얼거리며 멜랑콜리하게 눈물 흘리든지 말든지, 존스노우의 빈 자리는 즉시 채워졌다. 존스노우의 자리였던 토마토 지지대 꼭대기층에도, 피더 스탠드 상단의 스텐레스스틸 스큐어에도 청소년 벌새들이 앉기 시작했다. 존스노우 한 마리가 빠진 덕분에 여러 청소년 벌새들이 포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힘이 비등한 여러 마리가 번갈아 드나들면서 새로운 '왕좌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왕좌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는 모두 떠나야 하는데, 삼일천하라도 누려보려는 청소년 수컷들이 목숨 걸고 부리로 칼싸움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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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성 폭풍'으로 등급이 한 단계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태풍 '어마(Irma)'의 길고 긴 망토자락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강풍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가늘어진 빗줄기 속에서 먹이를 찾아 다니던 모킹버드와 브라운뜨래셔 같은 중간 크기의 새들도 활동을 멈추고 두꺼운 관목숲 아래로 피신했다.


그토록 거친 비바람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벌새가 한 마리 있었다. 거의 날려갈 듯 하면서도 바람을 거슬러 날아와 세로형 넥타통에서 목을 축인 후, 건너편의 윈터베리 울타리 속 은신처로 돌아가기를 10여 분에 한번씩 반복했다. 목에 붉은 깃털로 피어나기 직전의 검은 반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컷 청소년 벌새가 분명했다. 그 와중에 다른 침입자를 쫓아내기까지 하는 이 녀석에게 나는 '스톤(ston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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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잔디밭 가운데 놓아둔 피더 스탠드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고, 스탠드에 달려 있던 세로형 넥타통도 잔디밭에 처박혔다. 스톤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부엌문 유리창에 부착해둔 가로형 넥타통에는 오지 않았다. 스톤은 잔디밭에 묻혀버린 넥타통 주위만 애처롭게 빙빙 돌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뛰어 나가서 피더를 주워 부엌문 바깥 손잡이에 걸어두었다. 그랬더니 스톤은 내 제안에 응답하듯, 강풍을 헤치고 날아와 문 손잡이에 걸려 있는 피더에서 넥타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 무모한 벌새가 과연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스톤은 윈터베리숲의 은신처에서 우리집 피더통으로 날아오다가 바람이 너무 심해서 날려갈 지경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기다렸다가 얼마 후 다시 비틀거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넥타통을 향해 날아왔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스톤의 사투는 두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고, 그 광경을 틈틈이 지켜보다가 스톤에게 정이 들고 말았다. 존스노우가 떠난 지 불과 하루 만에 말이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맑았고, 스톤이 늠름한 모습으로 존스노우의 토마토 지지대 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이틀 전까지 존 스노우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스톤은 목 양끝과 중앙에 세 군데 스팽글처럼 붉은 깃털이 돋아 있어서 다른 청소년 벌새들과 구분하기가 쉬웠다. 이전에는 존스노우의 자리를 노리는 청소년 벌새 중 하나에 불과했던 스톤이, 이제 나에게 조금 각별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물론 오래 정들기 전에 스톤도 떠나겠지만 말이다.


스톤의 행동 양태는 존스노우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존스노우는 자기 눈앞에서는 어떤 다른 벌새에게도 넥타통을 허용하지 않았다. 식사 중에 옆에 누가 나타나면 일단 멀리 쫒아내고 온 다음 나머지 식사를 했다. 식사사를 제대로 하는 것보다는 밥그릇을 남에게 뺏기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스톤은 가끔 넥타통에서 다른 놈이랑 같이 먹기도 했고, 자신이 실컷 먹은 다음에서야 적을 쫒아내는 행동을 했다. 토마토 지지대에서도 존스노우가 늘 똑같은 자리에만 앉았다면, 스톤은 여러 군데 자리에 앉아보기를 즐겼다. 깻잎밭을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관찰을 하고, 제자리에서 1미터 가량 수직으로 날아올랐다가 내려오는 방식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다.


청소년 벌새답게 호기심과 스태미너는 상당해 보였지만, 첫번째 철새여행에서 살아남기엔 아직 경험과 지략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어서 먹고 몸을 만들어 여행을 떠나야 하고, 먹이가 부족할 때 재빨리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토포 상태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운이 좋아야 한다. 존스노우도 처음엔 이 철부지 스톤처럼 미숙하고 무모했겠지. 스톤이 떠나는 날 또 울지 않기 위해서 스톤 이외의 다른 청소년 벌새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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