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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Feb 02. 2022

다시 봄, 너를 기다리며

벌새와 나의 이야기 16


(이듬해) 2018년 4월 1일,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남쪽에서 올라온 첫번째 벌새를 발견한 날! 

조지아에 벌새가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넥타 피더에 설탕물을 가득 채워 뒤뜰 스탠드에 걸어놓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엔 암컷이 나타났고, 뒤이어 수컷이 나타났다. 존스노우의 귀환인지 다른 수컷 벌새의 방문인지 모르지만, 그 많은 경로 중에서 하필 우리집 뒷마당 피더를 찾아왔다는 건, 이 피더를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벌새그네에 달렸던 구슬과 철사들을 재활용하여 수선한 조잡한 넥타 피더


작년에 손잡이를 부셔 먹은 피더를 화분걸이 철사로 수선하고, 벌새 그네에 달렸던 보석들을 재활용해서 장식했는데 막상 벌새가 그 위에 앉자 초점거리 차이 때문에 사진 찍기에 방해가 되었다. 이 조잡한 피더의 장식을 벌새들은 꽃처럼 인식하고 좋아하는 듯했다.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구슬을 자세히 관찰하고, 혀를 내밀어 핥아보는 장면을 몇 번씩이나 목격했다. 너무나 기뻤지만, 아직 이 수컷 벌새가 나의 존스노우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존스노우인 줄 알았으나, 다음날 다시 북쪽으로 떠나버린 벌새


그러나 이 첫번째 수컷 루비뜨로티드는 다음날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존스노우가 아니라 좀더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에 잠시 들린 나그네 벌새였나보다. 새로운 수컷이 나타날 때마다 존스노우가 아닐까 기대했지만, 아직은 날씨가 불안정해서인지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버리기만 했다. 


존스노우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혹은 우리집을 찾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취미용품 재료 가게에 달려가서 이 궁리 저 궁리하며 물건을 뒤지다가, 신부 들러리들이 드는 커다란 빨간장미 부케와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철사가 들어간 붉은 리본을 사왔다. 벌새들이 본능적으로 빨간색에 반응하기 때문에, 벌새 피더들은 대체로 빨간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들이 많았다. 벌새 애호가들은 봄에 벌새를 유인하는 방법으로 빨간색 꽃을 기르던가 피더에 빨간색 장식을 달라고 조언했다. 빨간 꽃을 기를 여력이 없었던 나에게 이 커다란 장미 조화 부케가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는지 50% 할인 행사까지 하고 있었다!      


버려진 전기스탠드를 재활용한 벌새스탠드. 빨간장미부케가 있는 자리엔 원래 동그란 전등갓이 얹혀 있었다. 


버려진 전등스탠드를 재활용한 벌새스탠드는 원래 제일 위쪽 전구와 동그란 전등갓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빨간장미부케를 얹어 고정했더니 희한하게 모양과 크기가 맞아떨어졌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아래쪽 잘록한 부분에 빨간색 리본까지 달아주었다. 벌새들이 과연 저 가짜 장미에 속아줄지 의문이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가다가 아래쪽을 쳐다보았을 때 한 송이 거대하게 피어난 빨간 꽃에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 존스노우가 기억이 희미해졌다면, 이 꽃을 보고 날아오다가 '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하면서 나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벌새소식지를 보니 루비 뜨로티드 벌새들은 아직도 북상 중이고 캔터키를 지나 인디애나주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조금 더 있으면 캐나다 퀘백주에서도 벌새들이 발견될 것이다. 벌새들이 처음 남쪽에서 이동하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4월은 벌새들이 북에서 남으로 떠나기 시작하는 9월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봄에 먼저 와서 꽃밭이나 피더를 차지하면 그 벌새는 그냥 이곳에 머무르고, 뒤늦게 와서 빈자리를 찾기 어려운 벌새들이 더 풍부한 먹이를 찾아 북상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미리 와서 며칠씩 머물다 다시 북쪽으로 떠나는 새들을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치열하게 죽기살기로 넥타통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벌새들은 사실 경쟁을 싫어하며,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북쪽으로 올라가 경쟁의 가능성이 낮은 곳을 찾아 정착하고 짝을 만나 새끼를 낳아 기르고 싶을 수도 있다. 나중에 올라오는 벌새일수록 벌새 밀도가 높은 곳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고, 그래서 더 피터지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이유로 더 먼 북쪽의 보금자리를 선호하는 벌새들은 더 빨리 철새 이동을 시작해야 할 테고, 우리집이 있는 조지아주처럼 비교적 남쪽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벌새들은 비교적 늦게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존스노우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설명이 되었다. 


4.17

전날 찬 바람을 타고 점심 무렵부터 나타난 새로운 벌새에게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충전하러 들린 벌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 있는 건, 이 새가 피더에 날아올 때마다 꼭 그 꼭대기의 빨간 장미 꽃다발부터 탐색해본다는 점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서 나일론천으로 된 붉은 꽃잎에 기다란 혀를 내밀어 맛을 보았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피더에 들러 설탕물을 먹기 시작했다. 피더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중간 중간 생각난 듯이 고개 들어 위쪽의 꽃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 꽃에는 언제 넥타가 맺히려나...생각하는 것처럼.


꼭대기의 인조장미꽃다발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벌새


그 벌새는 다른 꽃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더니 또 인조 꽃다발을 이룬 커다란 장미꽃 하나 하나를 다 핥아보았다. 그러다가 맨 꼭대기쪽에 붙은 꽃송이에 퍼질러 앉아 꽃잎 깊숙이까지 혀를 넣어보았다. 거기에 빗물이나 이슬이 고여 있거나, 아니면 벌레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벌새를 보고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은박포일로 작은 원추형 컵을 만들어서 설탕물을 붓고 맨 꼭대기 꽃들 사이에 꽂아주었고, 플라스틱 빨대를 접어서 아래쪽을 고정한 다음 그 속에 설탕물을 채워넣고 인조꽃들의 중심에 꽂아주었다. 벌새가 다시 나타날 때 꽃 사이 사이에서 설탕물을 찾아먹는 기쁨을 제공하고 싶었다. 


잠시 후 그 수컷 벌새가 돌아왔다. 그러나 아까 철저한 조사를 마친 후 결론을 내린 탓인지 조화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곧장 피더에 앉아 식사를 했다. 나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변덕스러운 봄바람이 꽤 심하게 불더니, 은박 포일로 만든 넥타 컵들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설탕물에는 횡재를 외치는 개미들이 꼬이고 있었다.


이렇게 새들과 나는 서로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설탕물을 주면 벌새가 와서 먹고, 해바라기 씨앗을 뿌려두면 카디널과 브라운뜨래셔와 모킹버드와 참새가 와서 먹는 것으로 응답을 한다. 물그릇을 씻어주고 깨끗한 물을 채워 놓으면 새들이 좋아하면서 차례대로 나타나서 물을 마신다. 두 개의 넓은 그릇에 물을 채워놓으면, 새들이 고민하다가 더 깨끗한 물그릇에서는 물을 마시고, 낡은 그릇에서는 목욕을 한다. 새들이 그런 구분을 하는 게 웃기고 신기하지만, 그들도 지능이 있기 때문에 몸둥이 하나로 사계절을 살아남고 새끼까지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아직 나의 존스노우(처럼 행동하는 벌새)는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수컷벌새가 나타나 새빨갛게 반짝이는 목을 나에게 보여줄 때마다, 머릿속에 새빨간 크리스마스 전등이 하나씩 켜지는 느낌이다. 따뜻하고 넉넉하고 즐거운 추억의 빛... 작은 벌새 한 마리가 가져다 주는 작지만 소중한 이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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