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이야기에 대한 아주 긴 에필로그
판타지 영화나 만화를 볼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들은 위기와 위기 사이의 평온한 부분들이다. 악당과 치열하게 싸우고 나서 간 마을에서 며칠간 맛있는 것도 먹고, 풍경도 구경하고. 이런 스토리와 상관없이 평화로운 부분. 마치 겨울에 찬물로 샤워하고 나왔을 때의 그 평온함같은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물론 시종일관 속도감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스토리들도 즐겁지만, 미궁에서 헤매다가 나와 평화로운 마을에서 술한잔 마시는 그 느낌도 만만치 않게 즐겁다. 롤플레잉 게임을 하면서 한 탐험이 끝나고 재충전을 위해 들른 마을, 거기서 벌어지는 사소한 이벤트들과같은 재미라고 해야하나.
장송의 프리렌의 주인공은 이미 너무 강력하고, 안 해본게 없는 엘프이다. 이미 마왕은 물리쳤고, 동료늘은 다 늙어죽어버렸다. 그리고 세상은 매우 평화롭다. 옷을 깨끗하게 해 주는 마법이라든지, 이런 마법들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이자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영원히 살아야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특히 대부분의 물질적인 것이나 명예에 관련된 목표들을 모두 이루었다면? 이미 목표를 상실하게 되었을텐데 삶이 더 이상 흥미로울까? 목표가 있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주인공은 매우 불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매우 행복하다. 그거야 작가가 행복하라고 결정했으니까 불행해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 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상한 마법들을 모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딱히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니체의 허무주의니 이런 것을 떠나,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어디엔가 작게나마 소속되고' 그 안에서 매일매일을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살아나갈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매일매일을 친구나 가족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원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