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늦가을..
도예수업을 하며 수강생들을 가르치든 나는 가마터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다 찾은 곳이 백월산 자락에 위치한 지금 공방이다.
젖소를 키웠다는 낡은 축사...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릴 것 같은 작은 문
마당 한편에 자리한 낮은 언덕과
개울 따라 서 있는 울창한 신우대숲
수확을 마친 감나무에는 미처 따지 못한 선홍빛 감이 그림처럼 매달려 있었다.
때는 가을이요.
만추의 햇살은 잔잔하게 반짝이는데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익숙한 그 느낌!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눈에 아련 거린 탓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돈과 그 땅의 무게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것은 내 것이 되었고, 막상 내 것이 되고 보니
축사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든 곳이라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만추의 햇살 속에서 나를 유혹했었든 풍경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가진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든 그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집을 지었고
공방이라 이름을 붙였다
마당은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넓었고 흙먼지가 날릴 만큼 삭막했다.
식구들을 모아서 급히 잔디를 심고
소답동 5일장이 서는 날이면
끝없이 작은 나무들을 사다 날랐으며
차 트렁크에는 들에 핀 꽃이라도 캐 오기 위해 호미와 작은 플라스틱 대야를 싣고 다녔다.
토끼풀까지 캐다 심을 정도로 온갖 것들을 다 캐다 심었는데..
들풀들의 번식력은 어마어마해서 잠시 웃고 즐기는 사이 넓은 마당을 잠식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말하자면 잔디밭이 토끼풀 꽃밭이 되었으며
강아지풀 한들거리는 풀밭이 되었다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당에 무엇인가를 심기 위해 땅을 파면 흙보다 돌이 더 많이 나왔다.
흙보다 돌이 많은 땅이라니...
얼마나 다행이든가.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삭막한 이 땅에 저 돌마저 없었더라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끙끙거리며 캐낸 돌로 화단을 만들고 화단 앞으로 디딤돌길을 만들며, 돌담도 쌓고 시간만 나면 돌을 들고 다녔었는데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없는 마당이 채워지는 듯한 모습에 손을 멈추지 못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있는 것만으로 가꾸다 보니 시간은 흐르고
공방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하나 둘 이어지면서
여자들은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발밑의 작은 꽃들과 아기자기한 도자기에
"아 예쁘다!" 감탄하고
남자들은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아무것도 없네!"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아무것도 없어서 눈물 났으나
아무것도 없어서 더 열심히 나를 찾아야만 했든 시간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져야 했다.
지난 토요일에는 가끔 따라다니든 여행단체에서 울산 간절곶에서 새해맞이 안녕기원제와 기장의 죽산성당 그리고 아홉산숲 트레킹을 한다는 여행공지에 집을 나섰다.
원래 나는 기원제를 지낸다거나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은 마땅히 갈 곳 없었기에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으로 훌쩍 따라나섰었다.
간절곶 고직한 바닷가를 겨울바람맞으며 혼자 걷는 동안 기원제는 끝나고 아홉산숲으로 출발하면서 그 숲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데 입장료에 비해 볼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조하는 그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대나무숲이 너무 좋다던데요?"
기대감이 반으로 접히면서 반쯤은 실망의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했다.
큰 바위에 새겨진 아홉산숲 표지판을 보며 가파른 길을 올라 길 좁은 모퉁이를 지나니
넓은 소나무 숲길이 펼쳐졌고,
맑은 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은 푸른 대나무숲과 함께 탁 트인 산길이 이어졌다.
아! 나도 모르게 낮은 감탄을 하며
걷고 또 걷고
휘돌아 오르고 내리는 길에는 키 높은 대나무가 거침없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이루는가 하면
천년은 견뎌냈을 듯한 금강송들도 저 높은 곳의 끝자락을 잡으려는 듯 높이 팔을 뻣으며 서 있었다.
숲길은 금강송과 대나무들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숲길에는 사람이 만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숲이 숲스러웠으며
아무것도 없어서 부담스럽지 않게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너는 너를 찾고,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길을 걸으며
오래전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고뇌했었든 그 날들이 생각났다.
세월은 흐르고
작은 나무들은 자라고
나무들은 너무 빨리 자라서
넓은 마당은 작은 숲이 되어간다.
가끔은 처음 그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넓은 마당이 그리울 때 있지만
여전히 나는 봄이 되면 작은 나무를 심고 있다.
아무것도 없었든 나의 마당은 지금도 없는 것들로 채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