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남자_3화
2020년 8월에 쓴 단편소설입니다
by 자자카 JaJaKa Feb 16. 2023
민주는 경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싱크대 앞으로 가서 쌓여있던 설거지를 했다. 요즘 들어 어깨며 목, 손목이 뻐근하고 시큰시큰 저려왔다. 일하는 동안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 손님이 없어 멍하니 있거나 가게 문을 닫고 집에 가서 누워있을 때면 직업병처럼 몸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가끔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누군가 옆에서 든든하게 그녀의 일을 도와주는 남자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가끔씩 몸이 고될 때 드는 생각이고 평상시에 민주는 그다지 남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직 젊고 할 일이 많다고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만나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사귀면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해 가정을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민주에게는 아직까지 멀게만 느껴졌다. 민주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매력 있는 남자가 주위에 없기도 하지만 민주는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카페를 보다 더 발전시키고 싶었고 무엇보다 민주 자신이 아직 젊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33살 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민주에게 주위의 사람들이 이미 너는 33살이나 되었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뭐래? 하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민주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흥미를 끄는 남자가 없었다. 6개월 전까지는 그랬다. 그 책 읽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매주 그녀의 카페에 오는 동안 책 읽는 남자는 처음에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주문을 한 다음 책을 읽다가 나갈 때 인사를 하는 정도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말 수가 없는 사람인지, 딱히 할 말이 없어서인지, 민주에게 말을 걸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조용하고 과묵한 편이었다. 때로는 민주가 먼저 말을 걸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읽고 있는 책은 재미있어요?
무슨 책을 좋아해요?
집에서 책을 읽는 거와 여기에 와서 책을 읽는 게 다른가요?
평일에는 어떻게 보내세요?
무슨 일 하세요?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나랑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데.
원래 말수가 없어요?
왜 맨날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거예요?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단순히 취향 때문인 건가요?
책 읽는 거 방해하면 싫은 표정을 지을 건가요?
원래 그렇게 무표정해요?
좀 웃어 봐요. 웃으면 훨씬 인상이 좋아 보일 것 같은데.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 민주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어도 그의 책 읽는 분위기나 책 읽는 모습에 어떤 관심이나 호기심이 생겼던 것일까? 남자로서의 관심이라기보다 자신의 카페에 자주 찾아주는 단골손님으로서의 관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일까?
갑자기 민주는 궁금해졌다. 책 읽는 남자가 매주 오는 그 시간에 출입문을 쳐다보며 신경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책 읽는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자신이 그저 단골손님으로서만 그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 그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한 것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이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자신의 속마음이 어떤지 그녀 자신도 궁금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민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다. 갑자기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어 져서 그녀는 자신을 위해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쭉 시원하게 들이켰다. 컵에 들어있는 얼음까지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으니 그나마 그녀의 가슴속을 뜨겁게 만들었던 그 무언가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민주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보자 얼른 손에 든 커피 잔을 내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민주는 다시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 속으로 빠져들었다. 원두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하고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커피를 잔에 담아 손님 앞에 내놓는 그 순간 그녀는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만든 커피를 마시는 손님의 표정에서 음, 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면 민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비록 회사 다닐 때보다 적은 돈을 벌더라도 그녀가 이 일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경미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 후 손님이 뜸한 한가한 시간 카운터에 앉아 있던 민주는 문득 그날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비가 아주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대기가 불안정해서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기는 했지만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퍼붓기 시작했는데 거의 폭우에 가깝게 비가 내렸다. 마치 동남아에서 내리는 스콜을 연상시키는 비였다.
어느 순간 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텅 비었다. 물론 그날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도 순간 멈춤 버튼을 누른 듯 갑자기 뚝 끊기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씨나 구린 날에는 커피가 생각보다 맛있게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원두라는 것이 습기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날씨가 맑은 날 커피 향도 커피 맛도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 비해 훨씬 더 좋다.
비가 오는 창밖을 가만히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민주가 카페 안에 흐르는 음악을 바꾸기 위해 아이패드를 손으로 만지다가 문득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날짜와 요일을 확인하는 순간 민주는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요즘 민주는 오늘이 주말이라는 것을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아이패드에 표시된 시간을 보니 오후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주의 시선이 거세게 비가 내리는 창밖과 텅 빈 거리를 보다가 아이패드에 표시된 날짜와 시간을 보았다. 이런 날씨에 그 남자가 설마 오겠어? 하는 생각으로 폭우가 내리는 텅 빈 거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손님도 없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민주는 간만에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라는 제목의 음악을 틀었다. 손님도 없고,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리면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간에 민주는 음악을 들으며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깐 스쳐 가는 비라고는 하는데 흐리고 컴컴한 하늘을 보아서는 언제 그칠지 알 수가 없었다.
가게 안에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던 민주의 입에서 ‘거 참 비 한번 시원하게 내리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만약 그녀가 지금 빗속을 뚫고 어디를 가야 하거나 비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내리는 비가 야속하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녀의 가게 안에 있고 더위를 식혀줄 반가운 빗줄기를 보니 그녀의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손님도 없을 텐데, 잠깐 쉬어가는 시간으로 생각해야지, 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서 그 퍼붓는 빗속을 뚫고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발이며 바지가 다 젖어서 몹시 축축해 보이는 그 상태로 걸음을 옮기던 그 사람이 민주의 카페 앞에서 멈추더니 우산을 접었다. 그때서야 민주는 그 사람이 책 읽는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 빗속을 뚫고 온 거야? 지금?’
민주가 속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가 접은 우산을 들고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했고 이런 날씨에 오다니 대단하기도 했다.
책 읽는 남자_4화(완결)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