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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가 JaJaKa Feb 02. 2022

은행(Bank)

2021년 시월의 어느 평일 오후

오랜만에 은행에 갔다. 요즘에는 은행에 갈 일이 별로 없는 터라 은행에 오는 일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입구에서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찍고 대기표를 뽑아 들고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 앞에는 이미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번호표를 든 채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의 차원으로 가운데 자리를 비워두고 앉아야 하는지라 앉을자리가 부족해진 나와 아내는 자리가 날 때까지 눈치를 보며 기다려야 했다.      


아내와 떨어져 앉아 내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열린 창구는 달랑 두 개였는데 한 창구에서는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슨 설명과 대화를 그리 오래 하는지 마치 친구끼리 만나 수다를 떠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언제 내 차례가 되나 하는 짜증이 난 눈빛으로 그 창구를 꼬나보던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짜증을 낸다고 해서, 저 말 많은 직원을 꼬나본다고 해서 내 차례가 빨리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내가 여기서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비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 나는 그 후로 조용히 눈을 감고서 차분한 마음으로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은행은 지금과 형태는 비슷했지만 여러모로 달랐다. 지금은 낮은 창구뿐이지만 그때는 높은 창구와 낮은 창구가 있었다.      


높은 창구에서는 기본적인 입출금이나 계좌이체, 공과금 납부 같은 간단한 업무를 주로 처리했고 낮은 창구에서는 정기예금이나 대출상담 같은 업무를 했었다. 높은 창구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업무 처리가 많아 선 채로 은행 일을 본 반면 낮은 창구에서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는 일이 많아 자리에 앉아 일을 보고는 했다.

    

그때의 기억 중에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은행 직원이 손으로 돈을 세던 모습이었다. 한 장 한 장 지폐를 셀 때마다 특유의 돈을 세는 소리가 났고 맨 마지막 지폐를 셀 때는 손가락으로 튕기듯이 마무리를 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얼마나 돈을 세면 저렇게 셀 수 있을까, 따로 연습을 하나? 하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돈 세는 기계가 있어서 거기에다가 돈을 넣으면 알아서 세어 주기 때문에 예전처럼 손으로 돈을 세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가끔은 그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한데.     


또한 한여름이 되면 은행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더위를 피하고자 은행으로 피서 아닌 피서를 오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따금 저녁뉴스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도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더위를 피해 마치 동네 사랑방에 온 양 의자에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 그냥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누구 하나 신경 쓰거나 제지하지 않던 그날의 풍경이 마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친구들과 주로 만나던 장소가 시내의 은행 앞이었다. 당시 은행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하여간 문이 닫힌 은행 앞은 친구나 지인을 기다리기 위한 약속의 장소가 되었고 그래서 은행 앞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서 있고는 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강남역의 뉴욕제과처럼 우리는 은행 앞에서 서로를 기다리고는 했다. 시내에서 만나는 일이 있으면 으레 은행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알 정도였으니까.     


친구를 기다리다가 때로는 다른 동창을 만나거나 선배를 만나는 일도 많았다. 다른 장소도 많은데 그 당시에는 다들 왜 은행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은행 앞의 공간이 넓었나? 공중전화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어서 전화 걸기 편해서 그랬나? 버스 정류장이 근처에 있어서 찾기 쉬워서 그랬나? 물론 내가 살던 곳의 얘기일 뿐이기는 하지만.     




아내와 떨어져서 앉아 기다린 지 1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 드디어 딩동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번호표의 숫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쪽 손을 번쩍 들면서 네, 하고 대답을 할 뻔했다. 옛날에도 이렇게 오래 기다렸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나는 내 번호가 표시된 창구로 걸어가면서 앞으로 은행에 볼 일이 있어 오는 경우가 생기면 정말로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오늘 은행에 온 목적인 청약예금의 액수를 증액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기존 통장을 없애고 새로이 증액된 청약통장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절차를 따라서 하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등등.  


막상 내 일을 처리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고 뭐라 할 게 아니었다. 나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리 서명하고 동의할 게 많은지 원.


볼 일을 마치고 은행을 나오니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이 목 언저리가 춥게 느껴졌다. 아직도 내 집이 없어 청약통장을 가지고 있다니 마음이 씁쓸했다. 청약 통장을 만든 지 꽤 오래되었건만 아직도 무주택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집값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이제나 저제나 집값이 안정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와 아내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다.     


언제쯤 집값이 안정이 될까? 언제쯤 내 집을 장만하게 될까? 언제쯤 이 청약통장에서 벗어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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