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휴양지로 여행을 간 건지 모르겠다. 꽤 오랜만인 것은 분명한데 정확하게 얼마만인지 바로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면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예전에 비해 느려진 것을 느끼고는 한다.
이 글은 휴양지에서 보낸 휴식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사실 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터넷으로 휴양지에 관한 블로그를 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갈 때, 특히 휴양지로 여행을 갈 시에 샤워기 필터를 꼭 가지고 가라고 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블로그에서는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물이 그리 깨끗하지 않으니 양치를 한 후에는 반드시 호텔에서 제공하는 생수로 입을 헹구고 샤워를 할 시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필터가 달린 샤워기로 교체를 한 후 사용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샤워기 필터가 장착된 샤워기를 구매해서 가져가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블로그에 게시된 사진 속의 샤워기 필터의 색깔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서 내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가져갈 때는 하얗던 샤워기의 필터가 불과 이삼일 사이에 누렇게 변한 사진을 본 후에는.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갈 일정이 생기자 나는 대형마트에 가서 샤워기와 필터를 구매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나의 여행지는 방콕과 푸껫, 두 곳이었다.
먼저 방콕의 한 호텔에 투숙했을 때는 필터의 색깔의 변화가 있었지만 아주 심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몇 달을 사용해도 샤워기 필터의 색깔의 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단 며칠 동안의 사용으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색깔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물이 그리 깨끗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런데 휴양지인 푸껫에서는 어땠을까.
푸껫의 한 리조트에 밤늦게 도착하고 곧바로 가져간 샤워기로 교체를 한 후에 샤워를 했다. 샤워기의 필터는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누렇게 변해버렸다. 방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색깔의 변화가 심해서 깜짝 놀랐다.
이 정도일 줄이야.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아직 며칠을 더 머물러야 하는데.
이렇게 심각할 줄 알았으면 교체용 필터를 더 챙겨 오는 건데.
아무래도 젊었을 때와는 달리 몸을 많이 사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좋다고 하면 따라 하게 되고 나쁘다고, 안 좋다고 하면 당연히 주저하면서 따라 하지 않게 된다.
“야, 그거 먹는다고 안 죽어. 야, 그렇게 한다고 안 죽어. 겁쟁이냐? 쫄기는, 자식!”
과거에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만 해도 어려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뭘 몰랐다고 해야 하나, 철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친구들 앞에서 쫄보로 보이기 싫었다고 해야 하나, 내키지 않아도 티를 내지 않고 젊은 혈기에 그냥 따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못 되어서 죽는 것도 두렵고 죽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사는 것이 두려운 나이가 되었다.
군대에서의 말년 병장처럼 가랑비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괜히 객기를 부리는 일을 만들고 싶지가 않다.
누렇게 변한 필터를 보니 조금 더 일찍 샤워기와 필터를 가지고 다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깜빡하고 양치를 하고는 생수가 아닌 물로 입 안을 헹구고는 했는데.
몰랐을 때는 모르겠지만 이젠 알았으니 예전처럼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앞으로는 필수품처럼 샤워기와 필터를 챙겨갈 것 같다.
동남아로 여행을 가게 되면, 특히 동남아의 휴양지로 여행을 가게 되면 샤워기와 필터를 챙겨서 가시는 건 어떨지 한번 고려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덧붙여 샤워기 필터뿐 아니라 세면대 필터를 챙겨가기도 한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