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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숙녀 윤지 16

by 자작가 JaJaKa

수현은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가 그의 숨통을 틔어주는 것 같았다. 낮게 가라앉은 장례식장의 무거운 공기를 마시다가 폐에 비로소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던 그가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 가서 혼자 있고 싶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캄캄한 어둠 속의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몸도 마음도 탈진한 사람처럼 지쳐버린 수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던지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기운이 없었다. 목이 칼칼하면서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내일 경숙의 발인이 몇 시였더라, 생각하다가 그때 참석을 해야 하는데 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수현은 오한과 몸살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잠에서 깼다. 이불을 푹 뒤집어써도 몸은 계속해서 떨렸고 이빨이 위아래로 딱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너무나 추워서 이불을 꽁꽁 싸 매여도 몸은 계속해서 떨렸고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려 보았지만 오한은 가시지가 않았다. 밤새 오한과 몸살로 시달리던 그가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 벨이 울리는 휴대폰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그게 꿈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비몽사몽 꿈결에 이마에 서늘한 수건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꿈을 꾸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꿈에서 낯선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그의 침대 옆에 앉아서 그의 이마에 계속해서 차가운 수건을 바꿔주던 낯선 사람이 전에 본 적이 있는 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마른 그의 입에 시원한 물을 마시라고 천천히 부어주던 사람을 어딘가에서 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은 채 그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고열과 오한으로 이불속에서 벌벌 떨었던 기억을 하던 그는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펄펄 끓었던 열이 떨어졌고 몸은 한결 가뿐했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볼 때면 언제 폭풍우가 지나갔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지금 그의 몸 상태가 그러했다. 정말 밤새 고열과 오한으로 벌벌 떨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몸은 평상시 일어날 때와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청나게 땀을 흘렸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침대 옆 협탁 위에 수건 두 개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간밤에 자신의 이마에 누군가가 차가운 수건을 얹어준 것이 꿈이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자기 집에 올 사람도 없고 자기가 통화한 사람도 없는데 낯선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들어온 것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잠결에 누구랑 통화를 했던 것 같긴 한데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일단 젖은 옷가지를 얼른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가서 확인하려고 새 옷을 꺼내서 침대에 올려놓고 막 윗옷과 아래옷을 벗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가 더 놀라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꼬꾸라졌다. 수현은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얼른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도대체 누구야, 하며 거실로 나간 수현은 죽이 담긴 쟁반을 들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방금 못 볼꼴을 보았다는 듯이 부끄러운 척하고 있는 박영선, 그의 담당 편집자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죽이 담긴 쟁반을 옆에다가 내려놓고는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무슨 기억이요?”


“어제 아침에 제게 보내주신 원고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 목소리가 정말 얼마나 안 좋던지 거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어요. 아마 제 날짜에 맞추시느라 몸을 혹사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서 제가 찾아와 봤더니 열이 펄펄 끓는데 헛소리까지 하시더라고요. 그냥 두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외람되지만 제가 옆에서 열이라도 낮춰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찬 수건으로 이마에 대어드리면서 간호해 드렸어요.”


그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었고 꿈속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실루엣이 사실은 그의 담당 편집자 박영선이었던 것이다.


“어제 아침이라고 했어요? 지금이...... 9시이고 밖이 환한데...... 그럼?”


“네 작가님은 24시간 주무셨어요. 다행히 열이 내려서 그나마 한숨 돌렸어요. 열이 내리고 나니깐 작가님이 자면서 더 이상 헛소리도 하지 않더라고요. 땀에 다 젖은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호호호”


“우리 집에서 밤새 있었던 아니죠? 아침에 다시 온 거죠?”


그가 설마 하며 물어보는 질문에 영선은 “밤새 있었죠. 아픈 환자를 두고 어디를 갔다 왔겠어요. 진짜로 열이 펄펄 끓었다니까요. 얼마나 놀랐는데요.”라고 당연한 일 아니냐는 투로 대답했다.


수현은 영선이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그녀 혼자만의 생각으로 자신을 간병한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먼저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고마우면 나중에 한 턱 쏘세요. 단단히요.”


영선은 눈을 찡긋하며 일단 따뜻할 때 먹으라며 죽을 내밀었다. 영선에게 신세를 톡톡히 졌으니 다음에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녀가 빡빡하게 굴어도 참아야 하는 나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어떻게 들어온 거야? 죽을 떠먹으며 수현은 생각했다.


자기 엄마의 비법을 듣고 만들었다고 하는 죽은 맛있었다. 오, 하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왔다. 자기 정성까지 담겨서 더 맛있을 거라며 죽을 먹는 그의 모습을 영선은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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